신뢰의 균열과 재설계: 공공 건축 심사위원회 거버넌스 위기와 해법
I. 서론: 왜 '가장 중대한 문제'는 심사위원인가
A. 공모안 구현을 가로막는 다층적 장애물: 구조적 병폐의 전경(前景)
한국의 공공 건축 프로젝트는 그 태동부터 준공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구조적 난제에 봉착한다. 사용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러한 난제들은 개별적인 문제라기보다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실패의 생태계(Ecosystem of Failure)'를 구성한다. 이 생태계는 공모안의 본질적 구현을 가로막고, 건축설계의 공공적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첫째,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경제적 토대의 부실함이다. "턱없이 낮은 공사비"는 프로젝트의 초기 단계부터 모든 가능성을 제약한다. 비현실적인 공사비는 필연적으로 "낮은 설계비"로 귀결되며, 이는 건축사무소의 경영난을 가중시키고 적절한 설계 인력 투입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결국 이는 "설계 품질 저하"라는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둘째, 정치적·행정적 개입은 설계의 자율성을 침해한다. "단체장에 따라 바뀌는 공모작"이라는 현상은 공공 건축이 전문성의 영역이 아닌 정치적 흥정의 대상으로 전락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발주처(공무원)의 잦은 간섭"과 비전문가인 발주처가 설정한 "과다한 용역 범위"는 건축가의 전문성을 무력화시키고 행정 편의주의적 결과물만을 양산하게 만든다. 이러한 과정은 준공 시점에서 "참사 수준의 결과물"을 낳고, "설계와 구현의 괴리"를 극대화하는 주된 원인이 된다.
셋째, 발주 시스템 전반의 비전문성이다. 발주처의 "전문성 부족"은 프로젝트의 방향 설정 오류를 야기하며, "특정 자재 강요"와 같은 불합리한 요구는 설계의 완성도를 저해하고 특정 이권이 개입할 여지를 만든다.
이처럼 낮은 보상, 높은 정치적 불확실성, 행정적 비전문성이라는 삼중고(三重苦)는 공공 건축의 품질을 담보할 수 없는 구조적 환경을 고착화시킨다.
B. 구조적 난제에서 '심사위원'이 핵심 변수가 되는 메커"니즘
본 보고서의 핵심 논리는, 앞서 언급한 구조적 병폐들이 '설계의 질' 자체를 평가절하하고, 대신 '수주' 행위 자체를 건축사무소의 유일한 생존 목표로 만든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구조적 결함이 어떻게 비윤리적 경쟁을 촉발시키는지 그 인과관계를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 '좋은 설계'의 가치 절하: "낮은 공사비"와 "낮은 설계비"는 '정상적인' 설계 품질 경쟁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아무리 뛰어난 '좋은 설계'를 제안해도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며, 심지어 그 설계안이 제대로 구현될 것이라는 보장(S_D1)조차 없다.
- '권력' 변수의 부상: "단체장의 의지"나 "발주처의 간섭"과 같은 정치·행정적 변수가 프로젝트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강력한 신호가 시장에 지속적으로 전달된다. 이는 '설계의 우수성'이 아니라 '권력과의 근접성'이 핵심 성공 요인임을 시사한다.
- '생존 투쟁'으로의 변질: 낮은 보상과 높은 불확실성이라는 극한의 환경 속에서, 건축사무소는 프로젝트의 가능성이나 공공적 가치를 타진하는 '가치 투자' 대신, 어떻게든 당선되어 단기적 이익이라도 확보하려는 '생존 투쟁'에 내몰린다.
- '심사위원'이라는 유일한 변수: 이 절박한 '생존 투쟁'에서, 건축사무소가 유일하게 통제 가능하다고 믿거나,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변수가 바로 '심사위원'이다.
결론적으로, "턱없이 낮은 공사비"와 "단체장에 따라 바뀌는 공모작"이라는 구조적 문제는 "심사 과정에서의 위법"과 별개의 사안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구조적 병폐는 심사 비리를 유발하고 심화시키는 강력한 *촉매제(Catalyst)*로 작동한다. 공공 건축이라는 생태계 자체가 근본적으로 병들어 있기에, 심사위원이라는 '권력'에 기생하려는 유인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용자가 '심사 과정에서의 위법'을 "가장 중대한 문제"로 지목한 것은, 이 문제가 다른 모든 구조적 병폐의 결과물이자 동시에 그 병폐를 더욱 악화시키는 핵심 고리(linchpin)이기 때문이다.
C. '제도가 아닌 사람의 문제'라는 진단: 본 보고서의 분석 프레임워크
사용자의 "결국 제도가 아닌 사람의 문제, 심사위원 구성의 문제"라는 진단은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관통한다. 이는 기존의 제도 개선 노력이 왜 실패했는지를 명확히 설명해준다. 심사 과정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각종 제도적 장치(예: 심사 과정 생중계, 명단 공개)는 '사람'의 동기나 '네트워크'의 작동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한 채, 절차적 투명성이라는 외피만을 강화시키는 데 그쳤다.
따라서 본 보고서는 추상적인 '제도'의 결함을 나열하는 대신, '사람', 즉 심사위원을 둘러싼 **거버넌스(Governance)**의 총체적 실패를 분석의 핵심 프레임워크로 삼는다. 구체적으로 심사위원의 선정(Selection) 과정의 공정성, 보상(Compensation)의 적절성, 감시(Monitoring) 시스템의 유효성, 그리고 책임(Accountability)의 엄중함이라는 네 가지 차원에서 현재 시스템이 어떻게 '사람의 문제'를 방치하고, 심지어 조장하고 있는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II. '심사위원을 먼저 본다': 참여자의 딜레마와 전략적 선택
A. '설계'가 아닌 '심사'를 설계하다: 공모 참여의 전략적 변질
공공 건축 설계공모에 참여하는 건축사무소들이 "프로젝트의 성격이나 좋은 결과물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하기보다 "심사위원을 먼저 보는" 행위는, 업계에 만연한 냉소주의와 전략적 왜곡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공모전이 더 이상 '최고의 설계안(Best Design)'을 가리는 경쟁의 장이 아니라, '심사위원의 의중을 해석하고 로비를 통해 표를 확보하는'(S_A2) 전쟁터로 변질되었음을 의미한다.
건축가들은 '건축'을 설계하는 대신 '심사'를 설계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다. 이는 막대한 시간과 자원을 투입하여 설계안을 개발하는 행위가, 심사위원 구성을 분석하고 이들을 공략하는 전략보다 후순위로 밀릴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전략적 변질은 공공 건축의 질적 저하를 가속화하는 것은 물론, 공정한 경쟁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업계 전체의 신뢰 자본을 파괴한다.
B. A유형과 B유형의 전략적 분화와 유동성
사용자는 건축사무소들이 심사위원을 분석하는 두 가지 상이한 부류가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A) "신뢰할 만한 심사위원이 몇 명이나 되는지를 보는 경우"와 (B) "사전접촉할 만한 심사위원이 포진됐는지 보는 경우". 이 두 유형의 전략적 목표와 행태는 다음과 같이 분석될 수 있다.
(1) A유형 ('신뢰할 만한 심사위원'): '수동적 영향력' 전략
A유형의 건축사무소가 찾는 '신뢰할 만한 심사위원'은, 반드시 '절대적으로 공정한' 심사위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많은 경우, 이는 '자신의 건축적 성향이나 철학이 명확하여 그 판단 기준을 예측 가능한' 심사위원을 뜻한다.
이들의 전략은 명시적인 불법 행위는 아니지만, 공모전의 본질을 왜곡할 수 있다. 이들은 해당 심사위원의 과거 작품, 비평, 강연, 저술 등을 면밀히 분석하여 그의 '건축적 취향'에 부합하는 '맞춤형 설계안'을 제출한다. 이는 '보편적 우수성'이나 '프로젝트의 최적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심사위원 개인을 향한 '전략적 아부'로 흐를 수 있다. 이는 '수동적 영향력' 행사 전략으로, 심사위원의 예측 가능성에 베팅하는 것이다.
(2) B유형 ('사전접촉 가능한 심사위원'): '능동적 영향력' 전략
B유형의 전략은 명백한 불법 및 비윤리적 행위를 전제로 한다. 이들은 "사전접촉"을 통해 심사 결과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 시도한다. 이러한 '접촉'은 단순히 안부를 묻는 수준을 넘어, 학연, 지연, 사제 관계 등 폐쇄적인 사회적 자본을 활용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업계 내부에 공고하게 형성된 '부패 네트워크'의 작동을 전제로 한다.
이들의 목표는 설계안의 우수성으로 심사위원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기반한 로비를 통해 '표'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는 공정 경쟁의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는 '능동적 영향력' 전략이다.
(3) 'A유형'과 'B유형'의 유동성: 도덕이 아닌 생존의 문제
사용자의 분석 중 가장 날카로운 지점은 "두 부류는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고, 기회를 보며 유동적인 포지션을 취하기도, 연합을 통해 역할 분담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는 A유형이 도덕적으로 우월하고 B유형이 부도덕하다는 단순한 이분법이 현실에서는 작동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이들의 유동성은 도덕적 기준이 아닌, 철저한 '생존'의 논리에 의해 결정된다.
- 전략적 계산: 건축사무소는 심사위원 명단을 보고 A유형 전략(맞춤형 설계)과 B유형 전략(사전접촉) 중 무엇이 더 당선 확률이 높은지 계산한다.
- 포트폴리오 구성: 7명의 심사위원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3명이 '신뢰할 만한 A유형'(예측 가능)이고 4명이 '접촉 가능한 B유형'(부패 네트워크 소속)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A유형 전략만으로는 과반인 4표를 확보할 수 없다.
- 불가피한 타협: 이 경우, A유형 전략을 주로 사용하던 '선량한' 건축사무소조차 생존을 위해 B유형 전략을 선택하거나, B유형 전략에 강점을 가진 다른 사무소와 '연합'하여 역할 분담(컨소시엄 구성 등)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
- 계산의 동일성: 결국 "신뢰할 만한 심사위원이 몇 명"인지를 세는 행위와 "사전접촉할 만한 심사위원이 몇 명"인지를 세는 행위는, 당선이라는 단일 목표를 위한 '표 계산'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 동일한 전략적 계산의 일부가 된다.
결론적으로, 이는 업계 전반이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는 극단적인 압박 속에서 윤리적 기준을 타협할 수밖에 없는 거대한 '회색 지대(grey zone)'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누가 부도덕한가'가 아니라, '왜 모두가 비윤리적인 전략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가'라는 시스템의 구조적 실패에 있다.
C. '사전접촉'의 스펙트럼: 암묵적 교감에서 명시적 위법까지
사용자가 언급한 '사전접촉'이라는 완곡어는 단일한 행위가 아니다. 이는 암묵적인 교감부터 명백한 범죄 행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가진다. 정책적 처방과 법적 규제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이 스펙트럼을 명확히 분류하고, 개입이 필요한 지점을 특정해야 한다.
'사전접촉'은 그 형태와 불법성의 정도가 명확히 다르다. 예를 들어, 학연·지연에 기반한 암묵적 교감은 심각한 비윤리적 행위이나 법적 처벌이 어려운 '업계 관행'의 영역에 속할 수 있다. 반면, 금품이나 향응을 제공하는 행위는 명백한 뇌물죄에 해당하는 범죄이다. 정책은 이 둘을 구분하여 접근해야 하며, 특히 입증이 어려운 회색지대의 비윤리적 행위를 어떻게 차단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다음 [표 1]은 '사전접촉'의 스펙트럼을 4단계로 분류하고, 각 유형의 위험도를 분석한 것이다.
[표 1: '사전접촉'의 스펙트럼과 위험도 분석]
| 유형 (Type) | 행위 (Action) | 근거 | 업계 인식 (Perception) | 법적/윤리적 위험도 |
| 1. 수동적/간접적 | 특정 심사위원의 성향, 철학, 과거 작품을 분석하여 '맞춤형' 설계안 제출 | '전략', '실력', '리서치' | 낮음 (윤리적 딜레마) | |
| 2. 관계 기반 (암묵적) | 학연/지연/사제 관계에 기반한 안부 인사, "잘 봐달라"는 식의 암묵적 교감 시도 | '인맥 관리', '업계 관행' | 중간 (심각한 비윤리, 입증 곤란) | |
| 3. 적극적/간접적 로비 | 제3자(영향력 있는 동료 교수, 정치인, 선배 건축가)를 통한 영향력 행사 및 청탁 | , | '로비', '영업', '네트워킹' | 높음 (청탁금지법 위반 가능) |
| 4. 적극적/직접적 위법 | 심사위원 본인과의 직접적 접촉, 금품/향응/특혜 제공 또는 약속 | , | '담합', '범죄' | 매우 높음 (명백한 불법, 뇌물죄) |
III. 작동하는 이중 잣대: 공정성의 외피와 불법성의 내핵
A. 공정성에 대한 공언: 제도적 투명성의 외피
현재의 공공 건축 설계공모 시스템은 표면적으로 '절차적 공정성'을 강력하게 표방하고 있다. 심사위원 명단의 사전 공개, 심사 과정의 실시간 인터넷 생중계, 심사위원 풀 내에서의 무작위 추첨 등은 모두 '밀실 심사'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투명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적 장치들이다.
이러한 제도들은 과거에 만연했던 불투명한 심사 관행을 개선하고, 심사 과정을 대중의 감시 하에 둠으로써 일정 수준의 절차적 진보를 이룬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사용자의 지적처럼, '제도'라는 외피를 강화했을 뿐, 그 안에서 작동하는 '사람'의 동기나 '네트워크'의 내밀한 작동 방식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
B. 공공연한 위법성: 제도를 무력화하는 '네트워크'의 내핵
제도적 투명성 강화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한 위법성"은 여전히 시스템의 내핵(內核)에 자리 잡고 있다. 특히 현행 투명성 제도가 이 불법적 네트워크를 척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들에 의해 역이용당하는 '투명성의 역설'이 발생하고 있다.
심사위원 명단을 심사 7일 전에 공개하는 제도가 어떻게 "사전접촉"을 막지 못하는지, 그 메커니즘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 제도의 의도: 명단 사전 공개(S_E2)는 부적격한 심사위원에 대한 이의제기 기회를 부여하고, 공정성을 대중에게 담보하려는 목적을 갖는다.
- 현실의 작동: 하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사전접촉이 발생한다. 이는 '접촉'이 7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급조되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방증한다.
- '네트워크'의 선행: B유형(사전접촉) 전략의 대상이 되는 심사위원은 이미 업계의 '네트워크' 내에서 수년에 걸쳐 '접촉 가능한 자원'으로 분류되고 관리되어 온 인물이다.
- '투명성의 역설': 이 '네트워크'에 속하지 못한 대다수의 건축가들에게 7일 전 명단 공개는 그저 '공정한 절차'로 인식된다. 하지만 '네트워크'에 속한 내부자들에게, 이 명단 공개는 자신들이 지속적으로 '관리'해 온 심사위원이 이번 심사에 실제로 포함되었는지를 '최종 확인'하는 절차로 전락한다.
- 로비의 집중: 더 나아가, 이 7일이라는 기간은 로비의 대상이 불특정 다수에서 특정인(명단에 포함된 심사위원)으로 확정되었음을 의미하므로, 오히려 이들에게 '집중적인' 로비(표 1의 3, 4유형)를 시도할 수 있는 '골든 타임'이 될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현행 투명성 제도는 '네트워크' 외부자에게는 공정성의 외피를 제공하지만, '네트워크' 내부자에게는 불법적 행위를 위한 '타겟(Target)'을 확정해 주는 시그널로 작동하는 심각한 역설을 안고 있다.
C. 신뢰의 붕괴: '누구를 믿을 것인가'라는 근본적 질문
이러한 공정성의 외피와 불법성의 내핵이라는 이중 잣대는 업계 전반의 "신뢰 자본"을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파괴한다. 시스템이 공정하게 작동할 것이라는 최소한의 믿음이 사라진 시장에서는 오직 냉소주의와 불법적인 '전략'만이 난무하게 된다.
이 신뢰 붕괴의 가장 충격적인 증거는 "익명의 협박"이다. 공정하게 심사하려는 '신뢰할 만한' 심사위원이 불법적 네트워크로부터 협박을 받는다는 사실은, 비공식적이고 불법적인 '네트워크'가 공식적인 '제도'보다 더 실질적인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공정하게 행동하는 것'이 이익이 아니라 오히려 '비용'과 '위험'이 되는, 심각한 시장 왜곡이 발생했음을 의미한다. 사용자의 질문 "과연 누구를 믿을 것인가?"는 단순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시스템 전체가 그 존재의의를 상실했음을 알리는 붕괴의 징후이다.
IV. 근본 진단: '사람의 문제'를 방치하는 시스템
사용자가 '사람의 문제'를 지적한 것은 정확하다. 그러나 이 '사람의 문제'는 개별 심사위원의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라기보다는, 부적절한 '사람'이 선정되도록 방치하고, 그들이 비윤리적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하며, 그 행동에 '책임'을 묻지 않는 시스템의 구조적 결함에서 비롯된다.
A. 심사위원 풀(Pool)의 구조적 한계: '그들만의 리그'
'사람의 문제'를 야기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심사위원 풀(Pool)의 폐쇄성이다. "심사위원 풀이 소수 전문가 집단"으로 고착화되어 있다는 지적은, 현재의 풀이 다양성과 개방성을 상실한 채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폐쇄적인 풀은 특정 대학, 특정 인맥, 특정 건축 철학을 공유하는 집단이 카르텔을 형성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항상 보던 사람이 심사"하는 구조는 두 가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첫째, 새로운 시각이나 비주류의 창의적인 제안이 진입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둘째, '사전접촉'의 효율성을 극대화한다. 로비의 대상이 소수의 고정된 인물들이므로, 건축사무소 입장에서는 이들 소수와의 관계 '투자'가 매우 효율적인 B유형 전략이 된다.
B. 선정 과정의 불투명성과 발주처의 개입
'무작위 추첨'이라는 제도적 외피에도 불구하고, 실제 선정 과정은 여전히 불투명하며 발주처의 입김에 크게 좌우된다. "발주처가 원하는 심사위원을 선정"하는 관행이 존재하는 한, 무작위 추첨은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여기서 '발주처의 개입'과 '심사 비리' 간의 위험한 공모(共謀) 관계가 형성될 가능성이 포착된다.
- 발주처의 동기: 발주처(지방자치단체장, 공무원)는 전문성이 부족하거나, "단체장의 의지"와 같은 명확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다. 이들은 '최고의 설계'가 아니라 자신들의 의도를 관철해 줄 '관리 가능하고 우호적인' 결과물을 원한다.
- '우호적 심사위원' 선정: 따라서 발주처는 '무작위'라는 절차를 교묘히 이용하여, 실제로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특정 심사위원을 위촉하려 시도한다. 이 심사위원은 대개 폐쇄적인 풀 내에서 발주처와 관계를 맺어 온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 공모 관계의 형성: 발주처의 '입맛'에 맞는 이 '우호적 심사위원'은, 동시에 건축사무소들의 '사전접촉 대상'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심사위원은 발주처의 의도(예: 특정 스타일 강요)와 특정 건축사무소의 의도(예: 당선)를 동시에 만족시켜줄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된다.
- '거래 시장'으로서의 기능: 결국, '심사위원 풀'은 발주처와 특정 건축가 집단이 '당선작 내정'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거래'를 하는 '시장(Marketplace)'처럼 기능하게 되며, 심사 비리는 이 시장의 '거래 비용'으로 전락한다.
C. 책임과 보상의 불균형: 비윤리적 행위의 조장
현재의 시스템은 심사위원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는 동시에, 그에 상응하는 보상과 책임을 요구하지 않음으로써 비윤리적 행위를 구조적으로 조장한다.
첫째, 심사위원은 한 프로젝트의 당락을 결정하고 수백억 원의 예산이 투입될 방향을 결정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다.
둘째, 이 막중한 권력에 대한 공식적인 보상(심사비)은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낮은 심사비"는 심사 행위의 공공적 가치를 폄하하며, 심사위원의 '윤리적 책임감'이나 '전문가적 자부심' 대신 '비공식적 보상'(사전접촉을 통한 향응, 미래의 편의 제공 등)에 대한 유혹을 높이는 구조적 결함으로 작용한다.
셋째, 가장 심각한 문제는 '책임의 부재'이다. 비윤리적 심사 행위나 명백한 오심(誤審)에 대한 처벌 규정은 "미미한 수준"이며, 사후 검증 및 평가 시스템은 사실상 전무하다.
막강한 권력, 터무니없이 낮은 공식 보상, 그리고 사실상 부재하는 책임이라는 이 세 가지 조건의 조합은 부패가 발생하고 번성하기 위한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V. 결론 및 정책 제언: '사람'을 바꾸는 거버넌스 재설계
A. 요약: '사람의 문제'는 '사람을 다루는 시스템'의 문제
사용자의 진단은 정확했다. 한국 공공 건축 설계공모의 위기는 추상적인 '제도'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그 제도가 '사람'(심사위원)을 선정하고, 보상하며, 감시하고, 책임지게 하는 방식, 즉 **'심사위원 거버넌스'**의 총체적 실패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해결책은 단순히 절차(예: 7일 전 공개를 10일 전 공개로 변경)를 수정하거나 또 다른 투명성 외피를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둘러싼 '생태계' 자체를 전면적으로 재설계하는 데 있다. 이는 단기적 처방, 중기적 전략, 그리고 장기적 비전을 포괄하는 다층적인 접근을 요구한다.
B. 단기적 처방: '사전접촉' 원천 차단 및 처벌 강화 (Triage)
가장 시급한 과제는 현재 작동 중인 불법적 네트워크를 차단하고, 공정성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다.
(1) '사전접촉'의 정의 확대 및 처벌 실효성 확보: [표 1]에서 분류한 유형 2, 3, 4(관계 기반 교감, 간접 로비, 직접 위법) 모두를 '부정행위'로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 특히(금품수수)은 물론,(학연/지연)에 기반한 모든 '사전접촉' 시도 자체를 부정행위로 간주하고, 적발 시 심사위원과 해당 건축사무소 모두에게 '원스트라이크 아웃제'(관련 업계 영구 퇴출)를 도입해야 한다. 현행 "미미한 처벌 규정"을 대폭 강화하여, 비윤리적 행위에 대한 '기대 비용'을 '기대 이익'보다 압도적으로 높여야 한다.
(2) 이해충돌 방지 실질화: 단순한 제척/기피 신청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심사위원 위촉 시, '최근 10년 간'의 학연, 지연, 사제관계, 공동 프로젝트 이력, 사적 교류 여부 등을 당사자가 직접 전수조사하여 '공개적으로' 서약하게 해야 한다. 허위 기재 시 즉각 자격을 박탈하고 공모 무효화 등 강력한 페널티를 부과해야 한다.
C. 중기적 전략: 심사위원 풀(Pool)의 전면적 해체 및 재구성 (Rebuilding the Pool)
단기적 처방이 증상을 완화하는 것이라면, 중기적 전략은 '사람의 문제'를 유발하는 근본 원인인 '폐쇄적 풀' 자체를 수술하는 것이다.
현재 문제의 핵심은 "소수 전문가 집단"으로 고착화된 '고정된 풀'과, 이로 인해 형성된 예측 가능한 '네트워크'이다. 이 네트워크는 '예측 가능성'을 기반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유일한 해법은 이 '예측 가능성'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무작위 추첨'은 풀이 고정되어 있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풀' 자체를 '무작위'에 가깝게 개방적이고 유동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1) 현행 심사위원 풀(Pool)의 폐기 수준 개혁: 현행 "심사위원 풀"을 전면 재검토하고 대규모로 확장해야 한다.
- 다양성 강제 할당: 신진 건축가, 지방 건축가, 여성 건축가의 비율을 의무적으로 할당하여 기존의 주류 네트워크를 희석시켜야 한다.
- 국제 심사위원(International Jury)의 의무적 포함: 이는(학연/지연)의 고리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즉각적인 방법이다. 국제 심사위원은 국내의 폐쇄적 네트워크로부터 자유로우며, 오직 '설계' 자체로만 평가할 유인을 가진다.
- 타 분야 전문가의 의무적 포함: 건축계 '내부'의 논리가 아닌, '공공'의 논리로 심사 기준을 다원화해야 한다. 인문학자, 사회학자, 도시계획가, 엔지니어, 그리고 가장 중요한 '최종 사용자 대표'(시민, 학생, 환자 등)를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
(2) 심사위원 선정의 독립성 확보: 발주처의 개입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심사위원 선정 권한을 발주처가 아닌 '독립된 제3의 위원회'(가칭: 공공건축심사위원선정위원회)로 완전히 이관해야 한다. 이 위원회는 건축계는 물론, 법조계, 시민사회, 감사 전문가 등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3) 심사위원 윤리 교육 및 강령 의무화: "심사위원 윤리 교육"을 일회성 행사가 아닌, 자격 갱신과 연동되는 '필수 의무'로 강화해야 한다.
D. 장기적 비전: 책임과 신뢰에 기반한 새로운 생태계 구축 (Building a New Ecosystem)
궁극적인 목표는 처벌과 감시가 없어도 '좋은 설계'가 승리하는, '신뢰'에 기반한 새로운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1) '심사위원 이력 및 평가' 데이터베이스 구축 및 공시:
심사위원에게 '단기적 권력'이 아닌 '장기적 책임'을 부여해야 한다. 모든 심사위원의 과거 심사 이력, 주요 심사평,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그들이 선정한 건축물의 '준공 후 평가(Post-Occupancy Evaluation)' 결과를 연동하는 공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야 한다.
이는(설계-구현의 괴리),(참사 수준의 결과물) 문제와 직접 연결된다. 심사위원이 "A라는 이유로 B안을 선정했다"고 공언했다면, 5년 뒤 그 건물이 실제로 A라는 가치를 구현했는지 평가받아야 한다. 이는 심사위원에게 자신의 '안목'과 '판단'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지우며, '좋은 심사'가 '좋은 평판'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다.
(2) 심사비의 현실화 및 '심사 전문직'화:
"낮은 심사비"를 대폭 인상하여 현실화해야 한다. 이는 심사 행위를 '봉사'나 '부업'이 아닌, 높은 전문성과 윤리성이 요구되는 '전문적 공공 서비스'로 격상시키는 상징적·실질적 조치이다. 합당한 보상은 비윤리적 유혹을 차단하는 강력한 '방파제' 역할을 한다.
(3) 근본 원인(구조적 병폐)의 동시 해결:
마지막으로, 본 보고서 I장에서 분석했듯 심사 비리를 '촉발'하는 근본적인 생태계의 문제를 반드시 동시네 해결해야 한다.
- "정당한 설계비"를 보장하고 "공사비 현실화"를 통해 '좋은 설계'가 구현될 수 있는 최소한의 물적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 "단체장의 변덕"으로부터 당선된 설계안의 '원안'을 법적으로 강력하게 보호하는 '설계권 보장'이 병행되어야 한다.
'좋은 설계'가 '정당한 보상'과 '성공적인 구현'(S_D1 방지)으로 이어지는 '공정한 시스템'이 구축될 때, 건축가들은 비로소 '심사위원의 안색'이 아닌 '프로젝트의 가능성'과 '공공적 가치'를 먼저 보게 될 것이다. '사람'을 바꾸는 것은 '처벌'이 아니라, '좋은 설계가 결국 승리한다'는 시스템에 대한 '신뢰'의 회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