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와 미로: 만프레도 타푸리의 역사적 프로젝트와 현대 건축의 비극적 변증법
1. 서론: 역사학의 위기와 '역사적 프로젝트'
1980년 출간된 만프레도 타푸리(Manfredo Tafuri)의 『구와 미로: 피라네시에서 1970년대까지의 아방가르드와 건축』(The Sphere and the Labyrinth: Avant-Gardes and Architecture from Piranesi to the 1970s)는 20세기 건축 이론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는 저작이다. 이 책은 단순한 건축 양식의 연대기가 아니며, 계몽주의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 건축이 직면해 온 구조적 모순과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파헤치는 치열한 역사적 탐구서이다.1 타푸리는 이 저서를 통해 르네상스적 질서의 붕괴 이후 건축이 겪어온 '비극'을 추적하며, 특히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건축이 어떻게 사회적 효용성을 상실하고 자율적인 언어 유희로 후퇴했는지를 냉철하게 분석한다.
본 보고서는 『구와 미로』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건축사적 배경과 이론적 전제들을 심층적으로 고찰하고, 타푸리가 제시한 '구(The Sphere)'와 '미로(The Labyrinth)'라는 두 가지 핵심적인 상징이 갖는 의미를 해독한다. 나아가 타푸리의 '부정적 사유(Negative Thought)'가 렘 콜하스(Rem Koolhaas)와 같은 현대 건축가의 담론에 미친 영향과 그 변증법적 관계를 규명함으로써, 이 텍스트가 오늘날 건축 담론에 던지는 시사점을 도출하고자 한다.2
1.1 저작의 배경: 베네치아 학파와 68혁명의 유산
타푸리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60년대와 70년대 이탈리아의 지적 풍토, 특히 베네치아 건축대학(IUAV)을 중심으로 형성된 '베네치아 학파(Venice School)'의 맥락을 파악해야 한다. 이 시기 이탈리아는 전후 경제 기적의 이면에 도사린 사회적 갈등과 1968년 학생 운동의 여파로 정치적 격변기를 겪고 있었다. 타푸리를 위시하여 마시모 카치아리(Massimo Cacciari), 프란체스코 달 코(Francesco Dal Co), 조르주 테이소(Georges Teyssot) 등의 학자들은 전통적인 건축사가 아닌,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이론과 구조주의 철학(푸코, 바르트)을 결합한 새로운 역사 서술 방식을 모색했다.4
이들은 근대 건축 운동(Modern Movement)이 내걸었던 유토피아적 약속—건축과 도시 계획을 통해 사회를 변혁할 수 있다는 믿음—이 허상임을 폭로하고자 했다. 타푸리에게 있어 근대 건축의 역사는 '승리의 역사'가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 양식에 포섭되어가는 '패배의 역사'였다. 『구와 미로』는 바로 이러한 패배의 과정을 추적하며, 건축이 어떻게 자본주의적 발전의 도구로 전락하거나, 혹은 현실로부터 도피하여 '침실(Boudoir)' 속의 언어 유희로 숨어들었는지를 보여주는 방대한 증거 자료집이라 할 수 있다.5
1.2 방법론적 전제: '작동적 비평'을 넘어서
타푸리 역사학의 핵심은 기존의 건축사 서술 방식, 즉 '작동적 비평(Operative Criticism)'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에서 출발한다. 작동적 비평이란 브루노 제비(Bruno Zevi)나 지크프리트 기디온(Sigfried Giedion)과 같이, 역사를 현대 건축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들은 과거의 사건들을 현대의 특정 디자인 경향을 옹호하기 위해 선택적으로 재구성하며, 역사를 직선적인 진보의 과정으로 묘사한다.1
반면 타푸리는 역사를 현재의 실천을 위한 도구로 삼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서문 「역사적 프로젝트(The Historical Project)」에서 역사가는 "자신의 구성물 위에서 메스를 들이대어 흉터가 사라지지 않는 수술을 감행하는 외과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9 이는 역사를 매끄러운 이야기로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들 사이의 단절, 모순, 그리고 해결되지 않은 갈등을 드러내는 '해체의 작업'을 의미한다.
| 비교 항목 | 작동적 비평 (Operative Criticism) | 비판적 역사학 (Critical History) |
| 대표 학자 | 브루노 제비, 지크프리트 기디온, 레오나르도 베네볼로 | 만프레도 타푸리, 프란체스코 달 코, 베네치아 학파 |
| 역사의 목적 | 현대 건축 디자인의 정당화 및 옹호 | 이데올로기적 구조와 모순의 폭로 |
| 시간관 | 목적론적, 직선적 진보 | 불연속적, 단절과 위기의 연속 |
| 건축가와의 관계 | 협력자, 이론적 후원자 | 적대자, 냉철한 분석가 |
| 방법론 | 연속성과 종합(Synthesis) 강조 | 해체(Deconstruction)와 분석(Analysis) 강조 |
타푸리의 '역사적 프로젝트'는 건축을 자율적인 예술 작품으로 보는 시각을 거부하고, 그것을 생산, 소비, 제도의 복잡한 네트워크 속에서 파악한다. 그는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의 사유 모델을 교차시키며, 역사를 "파편들의 고고학"으로 재구성한다.1 여기서 역사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의 프로젝트(Project of Crisis)"로서 끊임없이 건축의 한계를 심문하는 역할을 수행한다.11
2. '구(The Sphere)'와 '미로(The Labyrinth)': 근대성의 원초적 갈등
『구와 미로』의 제목은 근대 건축이 직면한 근본적인 딜레마를 상징하는 두 가지 극단적인 모델을 지칭한다. 타푸리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특히 **에티엔-루이 불레(Étienne-Louis Boullée)**와 **지오반니 바티스타 피라네시(Giovanni Battista Piranesi)**의 작업에서 이 두 가지 상반된 태도의 기원을 찾는다.13
2.1 구(The Sphere): 불레와 이성의 침묵
에티엔-루이 불레는 계몽주의적 이성을 건축적으로 구현하고자 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대표작인 '뉴턴 기념비(Cenotaph for Newton)'는 거대한 구형(Sphere)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타푸리에게 있어 '구'는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를 넘어선 이데올로기적 상징이다.14
- 완전한 통제와 자율성: 구는 시작과 끝이 없는 완벽한 형태이다. 이는 외부의 혼란스러운 현실과 단절된, 그 자체로 완결된 소우주(monad)를 상징한다. 불레는 혼란스러운 도시의 현실을 거부하고, 순수한 기하학적 질서를 통해 건축의 절대적인 자율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 말하는 건축(Architecture Parlante)과 침묵: 불레의 건축은 흔히 형태 자체가 기능을 설명하는 '말하는 건축'으로 분류되지만, 타푸리는 이를 역설적으로 '침묵(Silence)'의 건축으로 해석한다. 사회적 현실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순수한 이념의 세계로 도피함으로써, 불레의 건축은 "숭고한 무용성(sublime uselessness)"을 획득한다.6 이는 훗날 모더니즘 건축이 추구하게 될 '자율성'의 신화, 즉 건축이 사회적 관계와 무관하게 독자적인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의 기원이 된다.
2.2 미로(The Labyrinth): 피라네시와 파편의 도시
반면, 피라네시는 이성의 통제가 불가능한 현실, 즉 '미로'를 직시한 인물로 묘사된다. 타푸리는 피라네시를 "사악한 건축가(The Wicked Architect)"라고 명명하며, 그가 근대 도시의 본질적인 모순을 최초로 폭로했다고 주장한다.15
- 감옥(Carceri d'Invenzione): 피라네시의 에칭 연작 『감옥』은 중심이 사라지고 무한히 확장되는 공간을 묘사한다. 이곳에서는 고전적인 원근법적 질서가 붕괴되고, 계단과 다리는 끊임없이 얽히며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다. 타푸리는 이를 단순한 환상적 공간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 기계와 관료제적 제도가 만들어낸 소외된 공간, 즉 탈출구가 없는 '미로'로서의 근대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는다.17
- 카 르포 마르치오(Campo Marzio): 로마의 캄포 마르치오 지역을 재구성한 피라네시의 도면은 타푸리 분석의 정점을 이룬다. 피라네시는 로마의 유적들을 역사적 맥락에서 떼어내어 평면 위에 무작위로 나열한다. 타푸리는 이를 "구토의 향연(banquet of nausea)"이라 부른다.19 여기서 건축물들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파편화된 채 충돌한다.
- 형식의 한계와 폭력: 『캄포 마르치오』는 유기적 통일성을 상실한 도시, 즉 현대의 대도시(Metropolis)를 예견한다. 이곳은 사물들이 상품처럼 나열된 공간이며, 전체적인 질서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개별적인 파편들의 충돌만이 존재한다. 피라네시는 이 혼돈을 숨기려 하지 않고 오히려 과잉되게 드러냄으로써, 건축적 형태가 더 이상 세계를 통합할 수 없음을 선언한다.5
2.3 해결되지 않은 변증법
타푸리는 불레의 '구'와 피라네시의 '미로'를 근대 건축이 진동하는 두 가지 극단으로 설정한다.
- 구(Sphere)의 길: 현실의 모순을 외면하고 순수한 형태와 질서의 세계로 도피하는 길. (예: 20세기 형식주의, 자율성 건축)
- 미로(Labyrinth)의 길: 현실의 혼돈과 파편화를 수용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언어를 찾으려는 길. (예: 아방가르드의 콜라주, 해체주의, 렘 콜하스)
타푸리의 비극적 결론은 이 두 가지 길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구'는 현실과 유리된 공허한 유희가 되고, '미로'는 자본주의의 혼돈 속에 매몰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 해결 불가능한 긴장이 바로 타푸리가 추적하는 "건축의 위기"이다.
3. 아방가르드의 모험과 실패: 혁명에서 부두아르(Boudoir)까지
타푸리는 20세기의 아방가르드 운동들을 이러한 변증법적 틀 안에서 분석한다. 그는 소련의 구성주의,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회민주주의 건축, 그리고 미국의 마천루를 거치며, 아방가르드가 어떻게 자신의 유토피아적 이상을 실현하는 데 실패하고 자본주의 체제에 포섭되었는지를 냉혹하게 서술한다.
3.1 바이마르와 소련: 계획(Plan)의 이데올로기
1920년대 독일과 소련의 아방가르드 건축가들은 도시 계획(Planning)을 통해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들은 피라네시적 '미로'(무질서한 도시)에 '구'(합리적 계획)의 질서를 부여하려 했다.
그러나 타푸리는 이러한 시도가 자본주의 발전 단계에서 요구되는 합리화 과정과 일치했음을 지적한다. 대규모 주거 단지(Siedlungen)와 도시 계획은 노동 계급의 삶을 개선한다는 명분을 가졌지만, 실상은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재생산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도구로 기능했다는 것이다. 즉, "이데올로기로서의 건축"은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은폐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아방가르드의 '형태 혁명'은 결국 자본주의적 합리화의 선구자였을 뿐이다.5
3.2 미국의 마천루: 노란 거인들과 자본의 숭고
타푸리는 유럽의 아방가르드와 대조적으로 미국의 마천루 현상에 주목한다. 뉴욕의 마천루들(타푸리가 "노란 거인들"이라 칭한)은 유럽과 같은 사회적 유토피아나 죄의식 없이, 순수하게 자본의 논리에 의해 세워졌다.21
마천루는 도시의 맥락을 무시하고 수직으로 치솟는 "예외의 유형학(typology of the exception)"이다. 이는 피라네시의 '미로'가 수직적으로 실현된 것으로, 도시 전체의 질서보다는 개별 건물의 상업적 가치와 랜드마크로서의 기능이 우선시된다. 타푸리는 미국 도시가 보여주는 이 "자유방임적 활력"이야말로 자본주의 도시의 본질이며, 여기서 건축가는 어떠한 윤리적 통제력도 갖지 못한 채 거대한 경제적 파도에 휩쓸리는 존재임을 간파한다.
3.3 부두아르 속의 건축 (L'Architecture dans le boudoir)
책의 후반부에서 타푸리는 1970년대의 네오-아방가르드, 특히 '뉴욕 파이브(New York Five)'와 알도 로시(Aldo Rossi)의 작업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이 챕터의 제목은 사드 후작(Marquis de Sade)의 소설 『침실에서의 철학』(La Philosophie dans le boudoir)에서 차용한 것으로, 세상과 단절된 밀실(Boudoir)에서 벌어지는 도착적인 유희를 의미한다.23
- 언어로의 도피: 타푸리는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 존 헤이덕(John Hejduk) 등의 건축가들이 사회적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무력감을 깨닫고, 대신 건축의 내부 언어(형태, 구문, 기호)를 조작하는 것에 몰두했다고 비판한다. 그들은 더 이상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으며, 대신 "형태의 유리알 유희(Glass Bead Game)"에 빠져들었다.1
- 피터 아이젠만: 아이젠만의 초기 주택들은 기능이나 의미를 거세하고 순수한 문법적 조작만을 보여준다. 타푸리는 이를 건축의 "고통"을 전시하는 마조히즘적 행위로 본다. 아이젠만은 소통 불가능한 언어를 통해 건축의 공허함을 드러내며, 이는 불레가 추구했던 '침묵'의 현대적 변주이다.26
- 알도 로시: 이탈리아의 알도 로시는 도시의 유형(Typology)과 기억에 천착했다. 타푸리는 로시의 '유추적 도시(Analogous City)'가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우울한 회고이자, 현실의 도시에서는 불가능한 질서를 꿈꾸는 또 다른 형태의 도피라고 분석한다.
- 제임스 스털링: 스털링은 과거의 파편들을 아이러니하게 조합한다. 타푸리는 이를 역사의 파편을 가지고 노는 냉소적인 유희로 보았으며, 종합이 불가능한 시대의 징후로 읽었다.23
이들에게 '부두아르'는 외부 세계의 간섭 없이 건축의 순수성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였지만, 타푸리에게 그것은 건축이 사회적 효용성을 완전히 상실했음을 자인하는 무덤과도 같았다.
4. 타푸리 이후: 렘 콜하스와 자본주의의 파도타기
타푸리의 『구와 미로』는 "건축의 죽음"을 선고한 책으로 오독되곤 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건축적 이데올로기의 죽음", 즉 건축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근대적 신화의 종말을 고한 것이다. 이 황량한 진단 이후, 현대 건축은 어떻게 나아갈 수 있었는가? 그 답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렘 콜하스(Rem Koolhaas)**이다.2
4.1 타푸리의 '최고의 학생'이자 '적대자'
렘 콜하스는 타푸리의 역사적 분석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고 수용한 동시에, 그 비관적인 결론을 전복시킨 인물이다. 콜하스는 타푸리가 진단한 "대도시의 힘 앞에서 건축은 무력하다"는 명제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타푸리가 이를 비극으로 받아들이고 비판적 침묵(또는 역사 서술)으로 물러난 반면, 콜하스는 그 무력함을 전략적 기회로 삼았다.2
- 정신착란증의 뉴욕 (Delirious New York, 1978): 이 책은 타푸리의 마천루 분석에 대한 콜하스식 응답이다. 콜하스는 뉴욕의 혼잡함(Congestion)과 형태적 불일치(Lobotomy)를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혼잡의 문화(Culture of Congestion)"라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옹호한다. 그는 피라네시적 '미로'를 긍정하며, 그 속에서 발생하는 예측 불가능한 사건들을 건축의 새로운 재료로 삼는다.29
4.2 '서퍼(Surfer)'의 은유: 파도를 타는 건축가
콜하스와 타푸리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파도를 타는 서퍼"의 은유이다. 콜하스는 도시 계획에 대해 논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건축은 서퍼가 파도에 관계하듯 대도시(Grossstadt)의 힘에 관계한다." 3
- 타푸리의 관점: 서퍼는 파도(자본주의의 흐름)를 통제할 수 없다. 그는 파도에 휩쓸려 다니는 수동적인 존재이며, 이는 건축가의 무기력함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 콜하스의 관점: 서퍼는 파도를 통제할 수는 없지만, 그 에너지를 이용하여 기교를 부리고 방향을 잡을 수 있다. 즉, 건축가는 자본주의의 흐름을 거스르려 하지 말고(근대 건축의 실패), 그 흐름에 올라타서(서핑) 전략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콜하스의 '포스트-크리티컬(Post-Critical)' 태도이다.31
4.3 정크스페이스(Junkspace)와 현대의 캄포 마르치오
콜하스가 묘사한 '정크스페이스(Junkspace)' 개념은 타푸리가 분석한 피라네시의 『캄포 마르치오』의 현대적 실현이다. 정크스페이스는 쇼핑몰, 공항, 오피스 단지처럼 끝없이 이어지고, 파편화되어 있으며, 위계가 없는 공간이다.32
- 유사성: 두 개념 모두 유기적 통일성이 상실된 상태, 무한한 축적과 나열을 묘사한다.
- 차이점: 타푸리는 이를 '구토의 향연'이라 부르며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려 했지만, 콜하스는 "정크스페이스는 우리 시대의 유일한 건축"이라며 그 속으로 뛰어든다. 콜하스는 타푸리가 경고했던 '미로'를 전 지구적인 스케일로 확장하고, '거대함(Bigness)'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 미로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구'(자율적 오브제로서의 거대 건축물)를 제안한다.3
결국 콜하스는 타푸리가 진단한 '위기'를 '비즈니스 모델'로 전환한 셈이다. 그는 타푸리의 역사적 프로젝트가 남긴 "해결되지 않은 흉터"를 봉합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 흉터를 디자인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5. 심층 통찰: 타푸리 사유의 현대적 의의
『구와 미로』는 출간된 지 40년 이상 지났지만, 그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며 현대 건축의 심층적인 구조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5.1 윤리적 건축의 불가능성
타푸리의 가장 고통스러운 통찰은 자본주의 하에서 "진정으로 윤리적인 건축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점이다.
- 통찰: 사회 참여적 건축(Engagement)은 자본의 관리 도구로 전락하고, 예술적 건축(Autonomy)은 엘리트의 유희로 전락한다는 '이중 구속(Double Bind)'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현대 건축이 '스타건축(Starchitecture)'이라는 상품이 되거나, '지속가능성'이라는 기술적 관리주의로 양분되는 현상은 타푸리의 예언이 적중했음을 보여준다.
5.2 부정성(Negativity)의 생산성
타푸리의 '부정적 사유'는 단순히 비관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거짓된 희망을 거부함으로써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힘이다.
- 통찰: "수술용 메스"로서의 역사학은 우리가 안이한 종합이나 절충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게 한다. 타푸리는 건축가들에게 "무용함"을 견딜 수 있는 지적 용기를 요구했다. 이는 현대의 상업화된 건축 환경에서 건축가가 자신의 행위가 갖는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끊임없이 성찰하게 만드는 윤리적 닻(anchor) 역할을 한다.10
5.3 미완의 프로젝트
타푸리의 역사적 프로젝트는 결론이 없는 열린 결말이다. 그는 구(질서)와 미로(혼돈) 사이의 긴장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냈다.
- 통찰: 이 해결되지 않은 긴장이야말로 창조적 생산의 원천일 수 있다. 콜하스를 비롯한 현대 건축가들은 이 긴장을 해소하는 대신, 그 긴장 자체를 공간화하고 있다. 따라서 『구와 미로』는 닫힌 역사책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현대 건축의 모순을 비추는 거울이다.
6. 결론: 흉터는 사라지지 않는다
만프레도 타푸리의 『구와 미로』는 건축 역사학을 단순한 양식의 기록에서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비판의 영역으로 격상시킨 기념비적 저작이다. 그는 에티엔-루이 불레의 '구'와 피라네시의 '미로'라는 강력한 알레고리를 통해, 근대 건축이 이성과 광기, 질서와 혼돈, 자율성과 참여 사이에서 겪어온 분투를 추적했다.
타푸리는 건축가들에게 위로를 주지 않는다. 그는 건축이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는 냉혹한 진실을 들이밀며, 아방가르드의 영웅적 신화를 해체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철저한 환멸(disenchantment)은 건축을 낭만적인 환상에서 해방시켰다. 렘 콜하스와 같은 후대의 건축가들은 타푸리가 남긴 이 '잿더미' 위에서 새로운 건축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그들은 타푸리의 비판을 수용하여 '서퍼'처럼 자본주의의 파도 위를 위태롭게 질주하고 있다.
"역사는 흉터가 사라지지 않는 수술을 감행한다"는 타푸리의 말처럼, 『구와 미로』는 건축이라는 신체에 지울 수 없는 자국을 남겼다. 그 자국은 우리가 건축을 바라볼 때마다, 건물의 화려한 외관 뒤에 숨겨진 권력과 자본,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작동 방식을 의심하고 질문하게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타푸리가 남긴 진정한 유산, 즉 '비판적 지성'의 영속성이다.
주요 개념 요약
| 개념 | 기원/맥락 | 타푸리의 해석 | 현대적 의의 |
| 구 (The Sphere) | 불레 (계몽주의) | 절대적 질서, 자율성, 침묵, 현실로부터의 도피 | 모더니즘의 순수주의, 현대의 아이코닉 건축, 자율성 논쟁 |
| 미로 (The Labyrinth) | 피라네시 (감옥/캄포 마르치오) | 자본주의 대도시의 현실, 파편화, 충격, 무한한 복잡성 | 정크스페이스(Junkspace), 네트워크 도시, 혼성적 리얼리즘 |
| 작동적 비평 (Operative Criticism) | 제비, 기디온 | 현대의 디자인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는 태도 | 디자인 마케팅, 피상적인 역사 인용, 선례 분석의 한계 |
| 부두아르 (The Boudoir) | 사드 / 타푸리 | 사회 변혁을 포기하고 언어적 유희로 후퇴한 아방가르드의 밀실 | 아카데믹한 형식주의, 파라메트릭 디자인의 양식화 |
| 역사적 프로젝트 (Historical Project) | 타푸리 (방법론) | 모순을 종합하지 않고 폭로하는 것, 흉터를 남기는 비판 | 비판적 건축 이론, 인문학적 건축 연구의 기초 |
| 서퍼 (The Surfer) | 콜하스 | 대도시의 힘(파도)을 통제하지 않고 그 위를 타는 전략 | 포스트-크리티컬 실천, OMA/BIG 등의 실용주의적 접근 |
참고 자료
- The Sphere and the Labyrinth: Avant-Gardes and Architecture from Piranesi to the 1970s - Goodreads, 12월 24, 2025에 액세스, https://www.goodreads.com/book/show/1126810.The_Sphere_and_the_Labyrinth
- The Operative Criticism of Rem Koolhaas, 12월 24, 2025에 액세스, https://www.acsa-arch.org/proceedings/Annual%20Meeting%20Proceedings/ACSA.AM.98/ACSA.AM.98.46.pdf
- An Incomplete Encyclopedia: Rem Koolhaas and S,M,L,XL - Jeremy Till, 12월 24, 2025에 액세스, http://www.jeremytill.net/read/279/an-incomplete-encyclopedia-rem-koolhaas-and-s-m-l-xl
- Tafuri, Manfredo - Dictionary of Art Historians, 12월 24, 2025에 액세스, https://arthistorians.info/tafurim/
- Manfredo Tafuri 'Toward a Critique of Architectural Ideology' (1969) | Begüm Sarı, 12월 24, 2025에 액세스, https://saribegum.wordpress.com/2016/04/25/manfredo-tafuri-toward-a-critique-of-architectural-ideology-1969/
- manfredo-tafuri-architecture-and-utopia-design-and-capitalist-development.pdf, 12월 24, 2025에 액세스, https://modernistarchitecture.wordpress.com/wp-content/uploads/2011/11/manfredo-tafuri-architecture-and-utopia-design-and-capitalist-development.pdf
- Re-setting the Critical Project, 12월 24, 2025에 액세스, https://www.acsa-arch.org/proceedings/Annual%20Meeting%20Proceedings/ACSA.AM.98/ACSA.AM.98.47.pdf
- Operative criticism and historical criticism in Manfredo Tafuri | 5 | - Taylor & Francis eBooks, 12월 24, 2025에 액세스, https://www.taylorfrancis.com/chapters/edit/10.1201/9780429297786-5/operative-criticism-historical-criticism-manfredo-tafuri-jorge-nunes
- The Disappearance: Manfredo Tafuri's The Sphere and the Labyrinth (April 2013), 12월 24, 2025에 액세스, https://site-writing.co.uk/the-disappearance-manfredo-tafuris-the-sphere-and-the-labyrinth-april-2013/
- History/Theory - Anthony Vidler - Theories in and of History - e-flux, 12월 24, 2025에 액세스, https://www.e-flux.com/architecture/history-theory/225183/theories-in-and-of-history
- Manfredo Tafuri: The Sphere and The Labyrinth | PDF - Scribd, 12월 24, 2025에 액세스, https://www.scribd.com/document/251521476/Manfredo-Tafuri-The-Sphere-and-the-Labyrinth
- TAFURI - Sphere and The Labyrinth - The Historical Project | PDF | Ideologies - Scribd, 12월 24, 2025에 액세스, https://www.scribd.com/document/73868193/TAFURI-Sphere-and-the-Labyrinth-The-Historical-Project
- Drawing [On] the Sublime - OBJECT TERRITORIES, 12월 24, 2025에 액세스, https://object-territories.com/new-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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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fera E Il Labirinto - Manfredo Tafuri - Google Books, 12월 24, 2025에 액세스, https://books.google.com/books/about/Sfera_E_Il_Labirinto.html?id=5Fh2QgAACAA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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