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담론의 인플레이션과 구축의 디플레이션
한국 현대건축은 현재 기묘한 역설의 시공간을 부유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건축을 둘러싼 담론과 이론, 사회학적 서사, 그리고 법규와 제도의 언어 등 '텍스트(Text)'의 영역이 그 어느 때보다 비대하게 팽창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물질적 실체로서의 건축, 재료의 물성, 구축의 논리, 그리고 시공의 정교함이라 할 수 있는 '텍스처(Texture)'의 영역은 급격히 빈곤해지거나 표피적인 이미지로 전락하고 있다. 본 리포트는 이러한 현상을 **'텍스트의 과잉(Textual Excess)'과 '텍스처의 부재(Textural Absence)'**라는 대립적 구도를 통해 진단한다.
우리는 건물이 지어지기도 전에 개념으로 소비되고, 완공된 후에는 공간적 체험이 아닌 인스타그램의 사각 프레임 속 이미지로만 유통되는 시대를 목격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압축적 근대화 과정에서 배태된 구조적 병리이다. '빨리빨리'로 대변되는 속도의 경제는 깊이 있는 구축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고, 건축가는 그 구축적 결핍을 메우기 위해 과도한 개념과 서사를 동원해왔다.
본 연구는 배형민이 제기한 한국 건축의 구조적 문제점들1과 임석재가 비판한 이미지 과잉 및 베끼기 관행2을 내부적 진단의 틀로 삼고, 이에 대한 이론적·실천적 대안으로 길 레신(Gilles Retsin)의 '이산적 건축(Discrete Architecture)' 담론3을 접목하여 분석한다. 나아가 『공간(SPACE)』 지에서 제기된 '침묵의 밀도'와 '구축적 책임'이라는 화두8를 통해, 과잉된 텍스트를 걷어내고 건축의 본질적 텍스처를 회복하기 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자 한다.
2. 텍스트의 과잉: 한국 현대건축의 병리적 징후
'텍스트의 과잉'은 단순히 말이 많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건축물의 물리적 실체보다 그것을 설명하는 말, 그것을 규정하는 법, 그것을 포장하는 이미지가 우위를 점하는 전도된 위계 질서를 의미한다.
2.1 개념의 조기 소진과 서사의 과잉 (Concept Burnout & Narrative Excess)
배형민은 한국 건축의 비평적 쟁점으로 '개념의 조기 소진'과 '서사의 과잉'을 지적한다.1 이는 한국 건축계가 서구의 이론적 트렌드를 수용하고 소비하는 방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한국의 건축 시장과 아카데미는 새로운 담론을 진득하게 체화하여 구축적 실험으로 연결하기보다는, 하나의 유행으로 소비하고 폐기하는 경향이 강하다. 1990년대의 해체주의, 2000년대의 다이어그램 건축, 최근의 도시 재생 및 커뮤니티 담론에 이르기까지, '개념'은 건축의 뼈대를 만드는 원리가 아니라 외피를 포장하는 '텍스트'로 소비되었다. 건축가는 척박한 시공 환경과 낮은 설계비라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건물 자체의 완성도(Texture)보다는 그 건물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나 철학적 배경(Text)을 과장하여 설득하는 전략을 취하게 된다. 그 결과, 물리적 실체는 빈약한데 설명은 거창한 '서사의 비만' 상태가 초래된다.
2.2 제도의 속도와 윤리의 자동화 (Institutional Speed & Automated Ethics)
'제도의 속도'는 텍스처의 부재를 가속화하는 핵심 기제다.1 한국의 도시 개발은 자본의 회전 속도와 정치적 임기에 맞춰 진행된다. 충분한 설계 기간과 시공 기간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건축가가 깊이 있는 재료의 물성을 탐구하거나 새로운 디테일을 개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러한 속도전 속에서 건축가는 '윤리의 자동화'라는 텍스트적 도피처를 찾는다. '친환경', '지속가능성', '공공성'과 같은 윤리적 가치들은 실제 건축물의 성능이나 공간의 질로 구현되기보다는, 인허가를 위한 체크리스트나 공모전 당선을 위한 수사적 텍스트로 기능한다. 건물의 단열 성능은 형편없지만 '친환경 인증' 마크는 획득하고, 실제로는 사용되지 않는 옥상 정원을 만들어 '녹색 건축'이라 명명하는 식이다. 이는 윤리가 텍스처(실천)가 아닌 텍스트(선언)로만 존재하는 위선적 상황을 낳는다.
2.3 이미지의 과잉과 동시대성의 오해 (Image Excess & Misunderstanding of Contemporaneity)
임석재는 한국 현대건축의 '이미지 과잉'과 '베끼기' 문제를 강도 높게 비판한다.2 이는 서구 건축의 표면적 스타일을 텍스트처럼 읽고 베끼되, 그 스타일을 가능하게 한 기술적·구축적 배경은 소거해버리는 현상을 말한다.
배형민이 지적한 '동시대성의 오해' 역시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1 한국 건축가들은 서구의 최신 트렌드를 실시간으로 모방함으로써 동시대성을 획득했다고 착각하지만, 그것은 이미지의 동시성일 뿐 구축의 동시성은 아니다. 노출 콘크리트를 예로 들면, 안도 타다오의 콘크리트가 가진 장인적 물성(Texture)은 생략한 채, 그 회색의 미감(Image/Text)만을 거푸집 자국을 흉내 낸 페인트로 재현하는 식이다. 여기서 건축은 실체가 없는 기호, 즉 텍스트로 전락하며 존재론적 위기를 맞이한다.
| 비평적 쟁점 (배형민/임석재) | 현상적 징후 (텍스트의 과잉) | 결과적 병리 (텍스처의 부재) |
| 개념의 조기 소진 | 유행하는 이론의 피상적 차용과 급격한 폐기 | 재료와 구축에 대한 진지한 탐구(R&D)의 실종 |
| 제도의 속도 | 법규와 인허가, 수익성 분석이라는 숫자의 지배 | 속도를 맞추기 위한 관습적 시공(습식)과 저급한 마감 |
| 서사의 과잉 | 건축물 자체보다 과장된 스토리텔링이 우선시됨 | 물리적 공간의 빈곤함을 현란한 언어로 은폐 |
| 동시대성의 오해 | 서구 건축의 '이미지'와 '스타일' 복제 | 구축 논리가 결여된 무대 세트와 같은 파사드 양산 |
| 윤리의 자동화 | 친환경, 공공성 등의 가치가 텍스트(인증)로만 존재 | 실제적 성능이나 사용자의 거주성과 괴리된 윤리 |
3. 텍스처의 부재: 매끈함(Smoothness)의 폭력과 습식의 관성
'텍스처의 부재'는 단순히 표면이 매끈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구축적 책임(Constructive Responsibility)'의 방기이자, 재료와 재료가 만나는 '접합(Joint)'의 실종을 의미한다.8
3.1 습식 공법과 모놀리스(Monolith)의 환영
한국 건축, 특히 주거와 일반 상업 건축을 지배하는 철근콘크리트(RC) 구조는 본질적으로 '비정형'적이고 '연속적'인 재료다. 콘크리트는 거푸집이라는 틀(Text)이 없으면 형태를 갖지 못하는 슬러지(Slurry) 상태의 물질이다. 이러한 습식 공법은 노동 집약적이며, 현장의 숙련도에 따라 품질이 좌우된다.
문제는 이 콘크리트 덩어리가 마감재(석재, 패널, 벽돌 타일 등)로 덮이면서 발생한다. 마감재는 구조적 역할을 하지 않는 단순한 '외피'이자 '이미지'로 전락한다. 구조(뼈)와 마감(피부)이 완전히 분리된 상태에서, 재료가 힘을 받고 전달하는 구축의 논리는 사라진다. 우리는 건물이 어떻게 서 있는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매끈하게 포장된 덩어리(Monolith)만을 보게 된다. 이는 '침묵의 밀도'가 결여된, 텅 빈 강변과도 같다.8
3.2 디지털의 오용: 연속성의 신화
길 레신(Gilles Retsin)은 초기 디지털 건축이 추구했던 '매끈함(Smoothness)'과 '연속성(Continuity)'을 비판한다.6 자하 하디드(Zaha Hadid)나 그렉 린(Greg Lynn)으로 대표되는 파라메트릭 디자인은 컴퓨터를 이용해 끊김 없는 곡면을 만들어내는 데 집중했다.
레신의 관점에서 이러한 '연속적 표면'은 텍스트의 과잉이 낳은 또 다른 형태다. 컴퓨터 화면 속의 매끈한 스플라인(Spline) 곡선은 실제 건설 현장에서는 엄청난 비용과 비효율을 초래하며, 결국 콘크리트를 붓거나 값비싼 금형을 떠서 만들어야 하는 '아날로그적' 방식으로 회귀한다.6 여기서 디지털은 구축의 도구가 아니라,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생성하는 텍스트 생성기로 전락한다. 한국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겪었던 시공상의 난맥상과 막대한 비용 역시 이러한 '디지털 텍스트'와 '물리적 텍스처' 사이의 괴리에서 기인한다.
4. 이론적 개입: 이산적 건축(Discrete Architecture)과 텍스처의 복원
이러한 텍스트 과잉과 텍스처 부재의 이분법을 극복하기 위해, 길 레신의 '이산적 건축' 담론은 강력한 이론적 도구를 제공한다. 레신은 디지털의 본질이 '연속성'이 아니라 '이산성(Discreteness)'에 있다고 주장한다.5
4.1 부분에서 전체로 (Part-to-Whole): 텍스처로서의 데이터
이산적 건축은 건축물을 무한히 해상도를 높일 수 있는 연속된 표면이 아니라, 레고 블록이나 픽셀처럼 명확히 구분되는 '단위 요소(Parts)'들의 집합으로 본다. "디지털 데이터와 같이 확장 가능하고 접근 가능하며 다재다능한 조각들"에 기반한 구축 논리다.5
- 텍스트(전체)의 해체: 기존 건축이 '개념(전체)'을 먼저 설정하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부재를 끼워 맞췄다면, 이산적 건축은 '부재(부분)'의 결합 규칙(Syntax)을 통해 전체 형상을 생성한다.
- 텍스처의 귀환: 여기서 텍스처는 장식이 아니다. 수만 개의 목재 조각이나 디지털 블록이 결합된 패턴 자체가 구조이자 마감이며, 동시에 미학이 된다. 뼈와 피부의 구분이 사라지며, 건축물은 그 자체로 정직한 구축의 텍스처를 드러낸다.
4.2 디지털 재료와 민주적 구축 (Digital Materials & Democratic Construction)
레신은 합판(Timber sheet)과 같은 표준화된 재료를 CNC 머신으로 가공하여 '디지털 재료(Digital Materials)'로 변환할 것을 제안한다.3 이는 한국의 건축 상황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자동화와 노동: 한국의 건설 현장은 숙련공의 고령화와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레신이 제안하는 자동화된 목구조 조립 방식은 현장 노동 의존도를 낮추고, 정밀한 공장 제작을 통해 고품질의 텍스처를 보장한다.
- 주거의 민주화: "주택 건설을 위한 개방적이고 분산된 플랫폼"3이라는 레신의 비전은, 소수의 대형 건설사가 독점하는 한국의 아파트 공급 구조에 대안이 될 수 있다. 누구나 다운로드 가능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지역의 작은 공방(Fab Lab)에서 부재를 깎아 조립하는 방식은 건축의 생산 주체를 다변화하고 '구축적 책임'을 분산시킨다.
| 비교 항목 | 연속적 건축 (Continuous/Textual) | 이산적 건축 (Discrete/Textural) |
| 기본 단위 | 표면 (Surface), 매스 (Mass) | 부재 (Part), 비트 (Bit) |
| 구축 논리 | 전체에서 부분으로 (Top-down) | 부분에서 전체로 (Bottom-up) |
| 주요 재료 | 콘크리트, 복합패널 (습식/성형) | 공학목재, 디지털 블록 (건식/조립) |
| 디지털의 역할 | 이미지 생성, 복잡한 형태 묘사 | 조립 로직 연산, 제작 자동화 |
| 미학적 특성 | 매끈함, 추상성, 은폐된 접합부 | 거침(Pixelated), 구축성, 드러난 접합부 |
| 한국적 맥락 | 아파트, 상가주택의 획일적 마감 | 모듈러 주택, 탈현장건설(OSC)의 가능성 |
5. 텍스처의 회복을 위한 제언: 침묵의 밀도를 향하여
한국 현대건축이 텍스트의 늪에서 빠져나와 텍스처의 실재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실천적 전환이 요구된다.
5.1 서사에서 구문으로 (From Narrative to Syntax)
건축가는 건물을 설명하는 소설가(Narrator)가 되기를 멈추고, 재료를 조직하는 프로그래머(Syntactician)가 되어야 한다. 건물의 가치는 "이 공간은 비움의 철학을 담았다"는 텍스트가 아니라, "이 목재 접합부는 인장력을 견디며 30분 내화 성능을 갖는다"는 텍스처의 사실성에서 나와야 한다. 이는 『공간』지가 언급한 '침묵의 밀도'를 회복하는 길이다.8 말이 없는 건축, 오직 물질의 결합 방식만으로 웅변하는 건축이 필요하다.
5.2 습식에서 건식/이산적으로의 전환
'제도의 속도'를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속도 자체를 텍스처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다. 현장에서 쫓기듯 붓는 콘크리트 대신, 공장에서 정밀하게 가공된 이산적 부재(Discrete Parts)를 현장에서 조립하는 방식으로의 전환이 시급하다. 이는 단순히 공법의 변화가 아니라, 건축의 해상도(Resolution)를 높이는 행위다. 고해상도의 건축은 이미지로 소비될 때보다 직접 체험될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5.3 재료의 진정성과 베끼기의 재정의
임석재의 비판처럼 남의 형태를 베끼는 것은 표절이지만, 레신의 관점에서 남의 '시스템'을 공유하는 것은 오픈 소스(Open Source)다.3 한국 건축계는 스타일을 베끼는 관행을 버리고, 데이터를 공유하고 개선하는 플랫폼적 사고를 받아들여야 한다. "어떻게 보이느냐(Look)"가 아니라 "어떻게 조립되느냐(How to assemble)"로 질문을 전환할 때, 비로소 한국 건축은 서구의 아류라는 혐의를 벗고 독자적인 구축 문화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6. 결론: 실재(The Real)의 복수
'텍스트의 과잉과 텍스처의 부재'는 한국 현대건축이 앓고 있는 신경증적 증상이다. 우리는 실체 없는 개념을 팔기 위해 너무 많은 말을 해왔고, 척박한 현실을 가리기 위해 너무 매끈한 이미지를 만들어왔다. 배형민이 지적한 개념의 소진과 제도의 압박, 임석재가 비판한 이미지의 허상은 모두 건축이 땅에 발을 딛지 못하고 텍스트의 공중을 부유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실재(The Real)'의 복수다. 길 레신이 주창한 이산적 건축은 디지털 기술을 통해 가장 원초적인 구축의 행위(쌓기, 맞추기, 엮기)를 현대적으로 복원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건축가가 다시금 '만드는 자(Maker)'로서의 위상을 회복하고, 재료 하나하나의 물성과 접합의 논리에 천착할 때, 비로소 한국 건축은 과잉된 언어의 거품을 걷어내고 묵직한 존재의 질감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텍스트는 사라져도, 텍스처는 남는다.
주요 참고 문헌 및 출처 표기
- 2
: 임석재, 한국 현대건축의 이미지 과잉과 존재론적 위기 비평. - 3
: Gilles Retsin, Discrete Architecture, Digital Materials, and Criticism of the Surface. - 1
: 배형민, 한국 현대건축 비평의 5가지 쟁점 (개념의 소진, 제도의 속도, 서사의 과잉 등). - 8
: SPACE(공간) 매거진, '침묵의 밀도'와 '구축적 책임'.
참고 자료
- 1월 1, 1970에 액세스, https://www.widear.com/
- 한국 현대건축 비평 | 임석재 - 알라딘, 2월 12, 2026에 액세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63895
- Gilles Retsin Discrete Timber Architecture - Bartlett Design Research Folios, 2월 12, 2026에 액세스, https://www.bartlettdesignresearchfolios.com/media/folio_docs/Design-Research-Retsin-Timber-04.pdf
- Discrete Assembly and Digital Materials in Architecture - ResearchGate, 2월 12, 2026에 액세스, https://www.researchgate.net/publication/361126686_Discrete_Assembly_and_Digital_Materials_in_Architecture
- Gilles Retsin: Bits and Pieces: Discrete Architecture - SCI-Arc, 2월 12, 2026에 액세스, https://www.sciarc.edu/events/lectures/gilles-retsin-bits-and-pieces-discrete-architecture
- Discrete and Digital | TxA 2016, 2월 12, 2026에 액세스, https://lthdigital.wordpress.com/wp-content/uploads/2020/03/discrete_and_digital_txa_2016.pdf
- GILLES RETSIN, how to reinterpret the digital world through architecture, 2월 12, 2026에 액세스, https://clotmag.com/interviews/gilles-retsinreinterpreting-the-digital-through-architecture
- 월간 SPACE (공간), 2월 12, 2026에 액세스, http://vmspace.com/
- 1월 1, 1970에 액세스, http://vmspace.com/2022/11/26/report-era-of-silence-and-act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