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

 묶인 글들은 모두 건축을 말하지만, 그것들이 가리키는 건축은 같지 않다. 어떤 글에서는 건축은 직능과 기율의 문제라 하고, 옆의 어떤 글에서는 생명과 물질의 재배치이며, 또 옆의 어떤 글에서는 현장에서 비용과 노동을 조정하는 판단이라 말한다. 또 다른 글에서는 건축은 사회를 비판하는 언어이고, 말과 글을 통해 이어지는 문화적 대화이기도 하다. 

 잡지의 주제는 이 차이 위에서 성립한다. 문장속에서 언어를 하나로 닫는 순간에 많은 실천은 그 바깥으로 밀려나기도 한다. 아직 합의된 언어가 없거나 모호한 관념은 때로 자신을 먼저 선언하면서 범위를 바꾸기도 하는 것 같다. 

 선언이 담론으로 연결되려면, 자신이 쓰는 언어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밝혀야 한다. 기존의 의미와 어디에서 갈라지는지, 다음 논의가 어디에 덧붙을 수 있는지도 남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차이는 생산적인 긴장과 설득이 아니라 병렬된 취향으로 흩어진다. 

 어쩌면 연결에 필요한 것은 학교에서 이미 탑재당한 어떤 공통정의를 다시 확인하는 것 보다는, 여러 글을 통과하면서 사후적으로 추출되는 임시적 공통관념이다. 이를테면 책의 글들은 각자의 건축을 말하지만, 대체로 건축을 완성된 대상이 아니라 관계와 조건 속에서 발생하고 조정되는 행위로 본다는 점에서는 만난다. 이 공통성은 처음부터 제시되기보다는 서로 맞지 않는 정의들 사이에서 읽으며 더듬어 찾아야 한다. 그 관념도 고정되어 있지는 않다. 하나의 글 안에서도, 한 건축가 개인에게도 그렇겠다. 같은 단어를 쓰더라도 다른 현장과 다른 시간 속에서 그 말은 조금씩 이동한다. 그렇다고 해서 작업과 서술 사이의 모순을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않길 바란다. 그것은 판단이 멈추지 않았다는 흔적일 수 있다. 문제는 모순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모순이 어디에서 생겼는지를 끝내 뭉게버리는 것 일수도 있다. 

 다만 이것이 잠정적인 글이 모호한 글이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작업을 닫지 않으려는 글일수록 그 시점의 판단은 더 분명해야 한다. 복잡한 조건을 늘어놓는 일과, 그 조건 속에서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밝히는 일은 다르다. 건축을 쉽게 정의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언급을 피하는 일과 판단을 미루는 일은 구분되어야 한다. 

  『미로 5호』가 반가운 이유는, 시도들이 건물로만 설명되거나 논의를 회피하지 않고 한곳에 놓였기 때문이다. 이런 건축-적이고 정치적인 글들이 더 많이 생산되고 읽히고, 서로를 수정하며, 다음 논의로 이어지길 바란다. 그 글들과 작업들을 읽으며, 그 위에 나의 말을 덧붙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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