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공간이 사람의 행동을 정의 할 수 있는가?

 

건축이 사회의 질서를 형성하거나 보조하는 시대는 저물고 있다.

 

이 작업에서는 건축 이후에 행위가 있지 않다.

이곳에서 건축은 그저 바탕일 뿐이며 주체는 이 공간을 점유하는 사람들의 행위이다.

영상분석기술로 리니어모터를 제어해 사람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분석해서 건축을 구성한다.

컴퓨터비전과 머신 러닝 기술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를 데이터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으로 기술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현상에서 작은 위상차 데이터까지도 정보로 가공할 수 있다.

덧붙여, ‘경험 기반’의 모호한 프로세스에서 정량적 정보의 활용은 과정이 간과하는 간극을 메울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uhXeuKvEa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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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자유센터 (2024 근대도시건축 디자인공모전)

 

정치적 암울함과 경제발전에의 기대 속에서 남산에 ‘기념비’를 짓던 어떤 이념들은 이데올로기와 함께 ‘퇴거’해 버린 지금. 역설적으로 이곳은 텅 빈 기표로만 존재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건축에서부터, 근대화 이후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상징, 컨텍스트, 위계적 구성같은 책임들을 덜어내고 이 새로운 자유를 공격적으로 개선하는 것이다.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것은 필연적으로 옛것과 새것의 대비를 발생시킨다. 때문에, 이것은 복원 프로젝트가 아니라 기존 건물에서 자라나는 프로젝트여야만 한다. 분명한 사실은 이미 고유한 형태가 70년이상 이 자리에 있었다. 이 자라난 부분에는 정면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공성의 구조이고, 도시의 지형으로 인해 접근이 용이하다. 이 부분은 기존 건축에 도달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더 다공성의 특질을 갖는다.

 

어떤 공간이 사람의 행동을 정의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일종의 폭력일 수 있다. 이 작업에서는 건축 다음에 행위가 있지 않다. 이곳은 그저 바탕일 뿐이며, 주이공은 이 공간을 점유하는 사람들의 삶과 행위이다.고전적인 건물처럼 일련의 둘러쌓인 방이나 특정한 시퀀스 같은 옛 것은 이곳에 없다.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경험을 구성할 것이다. 둘러쌓임과 깊이감, 방향을 만들어내는 대각선 방향의 공간 풍경을 만들었다. 모더니즘 건축의 약점 중 하나는 벽으로 둘러쌓인 ‘반복적인 공간’인데, 이 건물에 그런 유형의 공간 구조를 ‘반복’하는 행동은 기술을 이전의 요소를 모방하는데 사용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제껏, 우리들은 반응형 접근 방식으로, 건축은 일시적인 시간만을 따라다녔다. 컴퓨터 과학의 혁명이 견고해보였던 모든 벽들을 녹여버릴 것처럼 보이는 지금 이 순간에, 미결로 남아있는 이미 지난 시대의 표상을 결론 맺고, 공공적인 장소를 만드는 것은 터무니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앞으로의 오래된 장소들이 소멸하지 않는 방법 중 하나일 것이고, 변하는 장소만이 낡지 않을 것이다.

 

‘용도’가 고정될 때 건축은 존재할지 모르는 정답에 귀결하려하기 때문에 ‘전시관’이라던가 ‘극장’ 등의 용도보다는 공공적 공간이라 한발 느슨하게 제안한다. 이것은 하나의 건물 외피 안에 포함되는 다양한 소규모 공간들의 독창적 디자인을 설정한다.어떤 큰 규모의 집회공간, 중규모의 전시를 위한 공간, 소규모의 만남을 위한 공간 혹은 혼자만을 위한 공간이 망라된다. 이들 공간들 내에 구성되어야 하는 기능들은 단순한 관계성을 가지고 형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건축 프로그램은 정지해있거나 하나의 견고한 흐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확 바뀔수도, 연속적으로 서서히 바뀔수도, 뒤섞일수도 있는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 볼륨은 현상에 대응하는 이동성을 가진 블록으로 원자화했다.

 

이 리노베이션은 남산에 과거부터 존재한 화악암질 암석층을 기반으로, 공적 장소들을 창조하기 위한 ‘비움‘들이 파내어진다. 이 매우 거대한 지층은 하나의 견고한 쉘터이자 동굴으로, 모든 현상(형태)의 데이터(위상, 각도, 거리, 군집, 시간 그리고 데이터 베이스) 에 반응으로 구축된다. 이 블록 내에서 주요한 공공 장소들은 건축요소들의 간극, 즉 암석 덩어리로부터 파내어진 비움들로 정의된다. 이들은 기억속에 부유하는 다수의 가능성들이며, 각각이 그것의 고유한 데이터-정보적, 기술적 유기체 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비어있기 때문에 개별 공간들은 그들의 고유한 논리에 따라 엄격하게 ‘맞춰질 수’ 있는데, 서로에게, 건물 외피로부터, 건축의 통상적인 어려움들로부터, 심지어 시간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다.

이번호는 흩어진 담론의 파편들을 끌어모아 한국 건축이 일본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번역어의 계보부터 동시대 건축가들의 실천까지 이 잡지 속의 풍부한 문헌과 깊이 있는 분석은 그 자체로 학술적 성취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이 지적 축적이 과연 동시대 한국 건축이 마주한 교착 상태를 돌파할 날카로운 칼날을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책 전반에 흐르는 톤은 어딘가 모르게 둔하고 안전하다. 이는 마치 잘 정리된 자료를 바탕으로 한 무의식적인 ‘자기방어적 첨삭’의 결과물처럼 보인다. 일본을 통한 비판적 성찰을 시도하면서도, 정작 우리 내부의 가장 불편한 문제들을 정면으로 겨누는 것을 주저하는 것 같다. 알지만 회피해서 무뎌진 부정들을 바라보지만, 안전한 역사적 분석과 이론적 고찰의 경계 안에 머무르려는 태도가 녹아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알다시피 건축의 외연을 확장하는 일은 안전지대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위험을 무릅쓰는 행위다. 이론적 담론이 우리가 당면한 현실, 즉 에너지 위기, 인구 절벽, 정치적 양극화와 같은 문제들과 만나는 지점에 건축이 서려면, 기존의 견고한 관념들을 해체하는 날카로운 시도가 필요하다. 지금껏 건축이 회피해 온 모든 것들은 현실의 인과관계 속에 있으며, 그것들을 외면한 채 건축을 묘사하는 것은 지적 나태이지 않을까?

미로 2호 <일본>은 훌륭한 숫돌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잘 갈린 칼날이며, 그것을 휘두를 용기다. 이 책이 그저 또 하나의 교양 서적으로 남지 않기 위해서는, 독자들이 이 책에 긁혀서 더 위험한 질문을 던지며 건축의 외연을 확장하는 시도로 이어져야만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경계의 환상을 넘어설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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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에서 형태란, 공간의 구성과 사회적 맥락을 전달하는 가장 직접적인 언어다. 형태는 건축의 시각적 표현이자 사유와 철학이 물리적으로 구현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형태가 지나치게 독자적인 미학적 언어로 자립할 때, 본래의 맥락과 가치를 잃고 공허한 기호로 전락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지금 건축의 현실이 바로 이 지점에서 위태롭다.

 

건축이란 무엇인가?

건축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다만, 그 속에서 무엇으로 가는가를 잊게 되면 앞서 간 사람들처럼 길을 잃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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