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시작만 있고 끝은 없는' 프로젝트의 방법론적 선언

 

니콜라스 네그로폰테(Nicholas Negroponte)가 1970년 저서 *아키텍처 머신(The Architecture Machine)*의 서문에서 던진 "이 프로젝트는 시작만 있고, 끝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라는 선언은, 단순한 수사적 겸손함이 아니다. 이는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논증과 일치하는 엄격한 방법론적 선언이다. 이 저작은 "컴퓨터 지원 건축이나 로봇 건축가를 주제로 한 결정적인 작품이나 대작(magnum opus)"이 아님을 의도적으로 명시한다.1

이 책은 "답을 찾고 싶은 사람"이나 "컴퓨터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2Section I: '현재 건축 관행에 대한 불만': 설계된 인공물(Artifact)의 실패, 1]. 오히려 이 책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는 문제를 더듬어 찾고(groping),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질문을 하는 데 관심이 있는" 학생들을 위해 쓰였다.1 네그로폰테는 자신의 작업이 "좋은 아이디어와 나쁜 아이디어를 모두 가지고 놀고 더듬는(fumbling)" 과정의 산물임을 인정한다.1

이러한 '더듬어 찾기'의 철학은 네그로폰테가 유일한 대안으로 제시하는 '제3의 대안', 즉 '진화적 프로세스'의 본질과 직결된다.2 '진화(evolution)'는 본질적으로 미리 결정된 '끝'이나 '최종적인 답'을 상정하지 않는 지속적인 적응 과정이다. 따라서 이 책이 "끝은 없다" 1고 말하는 것은, 책의 핵심 내용(진화적 프로세스)이 책의 형식("결정적인 대작이 아님" 2)과 일치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솔루션'을 제공하려는 엔지니어링 접근 방식(대안 1, 2)과, '질문'을 탐구하려는 사이버네틱스 접근 방식(대안 3) 4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1960년대와 70년대의 주류 인공지능(AI) 연구가 '일반 문제 해결 기계(general problem solving machine)' 5를 통해 명확한 '답'을 찾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네그로폰테는 건축의 문제가 본질적으로 "비-알고리즘적(not algorithmic)" 6이며 "처리해야 할지 모르는 문제" 1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더듬어 찾기'는 이러한 불확실한(ill-defined) 설계 문제를 다루는 유일하게 정직한 방법론이며, '답을 아는' 기계가 아닌, 건축가가 "생각에 대해 생각하도록(thinking about thinking)" 7 돕는 기계를 제안하는 것이다.

 

I. '현재 건축 관행에 대한 불만': 설계된 인공물(Artifact)의 실패

 

네그로폰테의 급진적 제안은 "현재 건축 관행에 대한" 그의 "일반적인 불만" 2에서 시작된다. 그는 자신의 논증을 세 가지 근본적인 '실패의 인식' 위에 구축한다 1:

  1. "물리적 환경이 모든 사람의 생활 방식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지는 않는다".2
  2. "건축이 인간의 필요에 대한 완벽한 반응이 아니다".2
  3. "건축가가 물리적 환경의 유능한 관리자가 아니다".2

이러한 근본적인 불일치와 불완전성 때문에, 그는 건축에 대한 핵심 은유의 전환을 제안한다. 즉, 건축을 "설계된 인공물(designed artifact)"이 아닌 "진화하는 유기체(evolving organism)"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1 '설계된 인공물'은 정적(static)이며, 건축가라는 외부의 창조자에 의해 하향식(top-down)으로 완성되는 순간 과거가 되어버린다. 반면 '진화하는 유기체'는 동적(dynamic)이며, 환경과의 지속적인 피드백을 통해 스스로를 조절하고(self-regulation), 형성하며(self-formation), 생성한다(self-generation).9 네그로폰테는 기존의 건축이 인간의 다양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의 방식과 필요 10에 적절히 반응하지 못하는 '정적인 인공물'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진화하는 유기체'라는 개념은 단순한 문학적 은유가 아니라, 환경에 대한 사이버네틱스적 재정의이다. 역사적으로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유기체'를 "스스로를 조직하는(self-organizing)" 존재로, '기계'를 "외부로부터 조직되는" 존재로 구분했다.9 그러나 노버트 위너(Norbert Wiener)와 로스 애쉬비(W. Ross Ashby)를 중심으로 한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는 '피드백(feedback)'과 '항상성(homeostasis)' 개념을 통해 이 구분을 무너뜨렸다.9 네그로폰테의 '불만' 2은 건축이 여전히 '칸트적 기계'(즉, 외부의 건축가에 의해 설계된 정적 인공물)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이다. 그가 제안하는 '진화하는 유기체' 2는 건축 환경 자체가 컴퓨팅 능력 13, 센서 14, 피드백 루프 8를 통해 '사이버네틱스적 유기체'가 되어야 한다는 선언이다.

이 개념은 MIT 건축기계그룹(Architecture Machine Group, AMG)의 'SEEK' (1969-70) 프로젝트에서 물리적으로 탐구되었다.15 'SEEK'는 블록으로 채워진 환경, 그 안에 사는 저빌(gerbils)이라는 살아있는 유기체, 그리고 컴퓨터의 내부 3D 모델 15에 따라 블록을 재배열하려는 로봇 팔(기계)로 구성된 사이버네틱 시스템이었다.15 실험 결과, 저빌들은 끊임없이 블록을 무너뜨리며 "컴퓨터를 압도하고 완전한 무질서를 창조" 15했다. 로봇 팔은 이 "불일치(mismatch)" 15에 대응하며 "반응적 행동의 징후" 15를 보였다.

'SEEK' 프로젝트는 네그로폰테의 비판을 실패함으로써 증명했다. 이 실험에서 로봇 팔은 '설계된 인공물'(컴퓨터의 내부 계획)을 방어하려는 '건축가'의 대리인이었다. 저빌은 '완벽한 조화' 2를 거부하는 예측 불가능한 '인간의 필요'를 대변했다. 저빌이 로봇을 "압도" 15한 것은, 정적인 '설계된 인공물' 모델이 '진화하는 유기체'(실제 사용자)의 동적인 삶을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는 네그로폰테의 핵심 비판을 물리적으로 입증한 것이다.15 이 '실패'는 환경 자체가 사용자의 행동을 '교정'하려 할 것이 아니라, 사용자의 행동으로부터 '학습'해야 한다는, 즉 '제3의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II. 계산적 설계의 세 갈래 길: 네그로폰테의 핵심 분류

 

네그로폰테는 기계가 설계 프로세스를 지원할 수 있는 "세 가지 가능한 방법" 2을 제시하며, 이는 이 책의 핵심 논리적 구조를 이룬다. 그는 명백하게 "나는 세 번째 대안만을 고려할 것" 2이라고 선언하며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한다.

세 가지 대안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1. (대안 1) 자동화 (Automation): "현재 절차를 자동화하여 기존 관행의 속도를 높이고 비용을 줄일 수 있습니다." 2
  2. (대안 2) 기계 호환적 방법론 (Machine-Compatible Methodology): "기존 방법은 기계의 사양 및 구성에 맞게 변경될 수 있으며, 기계와 호환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문제만 고려됩니다." 2
  3. (대안 3) 진화적 파트너십 (Evolutionary Partnership): "진화적이라고 간주되는 디자인 프로세스를 기계에 제시할 수 있으며, 상호 훈련, 탄력성 및 성장이 개발될 수 있습니다." 2

이 세 가지 경로는 컴퓨터 지원 설계(CAD)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가능성을 예언적으로 분류한다. 다음 표는 네그로폰테의 세 가지 대안을 핵심 개념, 그의 비판, 그리고 현대 기술과의 연관성 측면에서 비교 분석한 것이다.

핵심 테이블 1: 네그로폰테의 세 가지 대안 비교 분석

 

대안 설명 (네그로폰테 인용) 핵심 개념 네그로폰테의 평가 및 비판 현대적 사례 (연구 자료 기반)
대안 1 "현재 절차를 자동화하여... 속도를 높이고 비용을 줄일 수 있습니다." 효율성, 속도, 비용 절감 "기존 관행"을 고착화시킴. "현재의 불만" 2을 해결하지 못하고 가속화할 뿐이므로 근본적으로 거부됨. 초기 CAD 및 현대 BIM: "항상 하던 일을 더 빠르고 저렴하게" 5 수행하는 데 중점을 둔 '순전히 양적인' 기술 사용.1718
대안 2 "기존 방법은 기계의 사양...에 맞게 변경... 기계와 호환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문제만 고려됩니다." 기계 호환성, 제약, 환원주의 "설계에 적대적" 20일 수 있음. 인간의 창의성을 기계의 경직된 논리 21에 종속시킴. 경직된 소프트웨어 워크플로우: 사용자가 "wobbly lines"(불안정한 선) 20를 그릴 수 없고, 기계가 정의한 "미리 결정된 설계 서비스" 21에 맞춰 사고해야 하는 모든 시스템 (URBAN5의 한계 포함).21
대안 3 "진화적... 디자인 프로세스를 기계에 제시... 상호 훈련, 탄력성 및 성장이 개발될 수 있습니다." 공진화(Co-evolution), 상호작용, 성장 유일하게 고려되는 대안.2 두 지능 시스템의 "긴밀한 연관".2 진정한 지능적 파트너십: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음 2). 현대의 '사이버네틱 팀 동료' 22 또는 '인간-AI 시너지' 23라는 제너레이티브 AI의 비전과 일치함.

 

III. 거부된 길: 자동화(대안 1)의 환상과 구속(대안 2)의 현실

 

네그로폰테는 자신의 비전을 명확히 하기 위해, 지적으로 빈곤하거나 위험하다고 판단한 두 가지 대안을 먼저 배제한다.

 

대안 1의 함정: 비판 없는 자동화

 

대안 1은 "기존 관행의 속도를 높이고 비용을 줄이는" 2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 네그로폰테는 이것이 지적으로 가장 무가치한 길이라고 즉각 간파한다. 그의 "일반적인 불만" 2은 설계 관행의 '속도'가 아니라 '관행 자체'의 부적절함에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실패한 관행을 단순히 자동화하는 것은 실패를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양산하는 것에 불과하다.

네그로폰테는 1970년에 컴퓨팅이 건축 분야에서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될 것이지만, 그것이 지적으로는 불모할 것임을 정확히 예견했다. 대안 1은 '효율성'이라는 자본주의적 가치 5에 완벽하게 부합한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50년간 건축 기술의 '디지털 턴' 5과 'CAD에서 BIM으로의 전환' 17은 주로 속도, 비용, 효율성 5의 관점에서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한 설계 역사학자가 지적했듯이, 이러한 "순전히 양적인 사용"은 "설계 역사가에게는 단지 미미하게 관련"될 뿐이다.5 왜냐하면 그것이 설계의 본질을 바꾸지 못했기 때문이다. 네그로폰테는 이미 1970년에 이 점을 꿰뚫어 보고, "기존 관행" 2을 더 빨리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고 선언했다.

 

대안 2의 현실: 기계에 의한 구속

 

대안 2는 "기계와 호환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문제만 고려" 2하도록 인간의 사고방식을 왜곡시키는, 더 교활하고 위험한 경로이다. 이 모델에서 인간의 창의성은 기계의 경직된 논리 21에 종속된다. 네그로폰테는 이러한 시스템이 "설계에 적대적" 20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네그로폰테 자신의 초기 핵심 프로젝트인 URBAN5가 '대안 2'의 완벽한 예시가 되었다. URBAN5는 "기계와의 대화" 6를 목표로 한 선구적인 시스템이었다.24 이 시스템은 IBM 2250 음극선관(CRT)과 라이트 펜을 사용하여 건축가가 그래픽 언어와 영어로 기계와 소통하려 했다.6

그러나 네그로폰테는 아키텍처 머신에서 URBAN5의 실패를 신랄하게 자기 비판한다.1 그가 지적한 한계는 다음과 같다:

  1. 경직된 가정: URBAN5는 '건축은 10피트 큐브의 집합'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가정" 6에 기반했다.
  2. 미리 결정된 서비스: 이 시스템은 "미리 결정된 설계 서비스" 21만을 제공했다. 비록 조합은 다양할 수 있으나, 그 결과는 "유한한" 21 해답의 틀에 갇혔다.
  3. 빈약한 소통: 상호작용은 "빈약한 소통 수단"(키보드, 라이트 펜, 모드 메뉴) 6을 통해서만 엄격하게 매개되었다.
  4. 지능의 부재: 기계는 건축가에게 "어떠한 제안이나 피드백도" 21 제공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URBAN5는 '대안 3'(기계와의 대화)을 지향하며 시작되었지만, 기술적 및 개념적 한계로 인해 실제로는 사용자가 기계의 논리6에 맞춰 생각해야 하는 '대안 2'의 전형이 되었다. 네그로폰테는 이 '실패'를 숨기지 않고, 오히려 책의 중심 논거("다양한... 시스템, 특히 URBAN5에 대한 경험에서 파생된" 2)로 삼는다. 그는 자신의 실험적 실패를 증거로 삼아, '대안 2'가 얼마나 쉽게 창의성을 구속하는지, 그리고 왜 진정으로 '진화적인' 21 '대안 3'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IV. '두 동료'의 연합: 제3의 대안으로서의 건축 기계

 

네그로폰테는 대안 1과 2를 거부하고 "세 번째 대안만을 고려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는 이 문제를 "두 개의 서로 다른 종(인간과 기계), 두 개의 서로 다른 프로세스(설계와 계산), 두 개의 지능 시스템(건축가와 건축 기계)" 2의 "긴밀한 연관" 2으로 재정의한다.

 

'주인-노예' 관계의 전복

 

네그로폰테의 선언에서 가장 급진적인 부분은 인간-기계 관계의 본질을 재정의하는 데 있다. 그는 "인공물이나 인공물에 지능을 부여함으로써 파트너십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아니라..." 2라고 말한다.

'주인-노예'(Master-Slave) 모델 27은 전통적인 '도구' 개념의 연장선이다. 이 관계는 '통제(control)'에 기반하며 '착취적(exploitative)' 28이다. 기계는 지능이 없는 '노예(slave)', '멍청하고(dumb)', '추종자(follower)' 8에 불과하다. 이 모델에서 모든 지능과 창의성은 '주인'(인간)에게서 나온다.

 

'두 동료'로서의 파트너십

 

네그로폰테는 이 관계를 "...오히려... 두 동료의 관계가 됩니다" 2라고 전복시킨다. 이는 "두 동료(associates)" 8의 관계이다. '동료(Colleague)' 모델 28은 '통제'가 아닌 '협력(collaboration)'에 기반하며, '착취적'이 아닌 '생성적(generative)' 28이다.

이 파트너십은 "두 개의 지능 시스템" 2을 전제로 한다. '동료'라는 은유는 기계에게 단순한 '지능'뿐만 아니라 '의도(Intentionality)'와 '자율성(Agency)'을 부여하려는 시도이다. '노예'는 명령을 수행할 뿐 의도나 자율성이 없지만, '동료'는 공통의 목표를 공유하면서도 독립적인 관점을 가진다. 네그로폰테는 "진짜" 파트너십 25을 상상했다. 이 관계는 너무나 개인적이어서, 기계가 "신선한 영감이나 더 높은 우선순위의 자극" 25을 가지고 "정중하게 서로의 일상적인 작업을 방해할 수 있는" 25 관계이다. 이는 기계가 단순히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URBAN5의 한계)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의도'를 가지고 대화에 참여해야 함을 의미한다.

 

공동의 목표: '자기 개선'의 열망

 

이 '두 동료'가 공유하는 공동의 목표는 단일한 설계안 도출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개선(self-improvement)에 대한 잠재력과 열망" 1 그 자체이다. 이 파트너십의 궁극적인 목적은 건축가와 기계 모두가 '상호 훈련'(mutual training)과 '성장'(growth) 2을 통해 더 나아지는 것이다.

기계는 단순히 지식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에 대해 배우고... 건축에 대해 배우는 법을 배울 수" 14 있어야 한다. 기계는 "주어진 정보 이상의 정보를 습득"하여 "도전하고 질문할 수 있는 잠재력" 30을 가져야 한다.

'자기 개선'이라는 개념은 '진화하는 유기체'라는 은유를 작동시키는 핵심 엔진이다. '진화'의 메커니즘이 바로 '자기 개선'을 통한 '적응'이기 때문이다. 네그로폰테의 비전에서, 건축 환경(유기체)은 그 자체로 진화해야 하며 24, 이 진화는 '건축 기계'(파트너)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진다.2 동시에, '건축가-기계' 파트너십 역시 '상호 훈련' 2을 통해 '자기 개선' 1을 이룬다. 따라서 '건축가-기계-환경'은 '자기 개선'이라는 공동의 열망 1을 통해 함께 진화하는, 거대하고 통합된 '공생(symbiosis)' 1 관계, 즉 하나의 거대한 사이버네틱 시스템을 형성한다.

 

V. 지적 뿌리: 워렌 맥컬록(Warren McCulloch)과 '윤리적 로봇'

 

네그로폰테는 자신의 '건축 기계' 개념, 즉 자율성과 자기 개선의 열망을 가진 파트너라는 급진적 아이디어를 정당화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지성이자 사이버네틱스의 창시자 중 한 명을 소환한다: "Warren McCulloch(1956)는 이를 윤리적 로봇(ethical robots)이라고 부릅니다.".1

워렌 맥컬록은 사이버네틱스 31의 핵심 인물로, 1946년부터 1953년까지 열린 전설적인 메이시 컨퍼런스(Macy Conferences)의 의장이었다.33 그는 뇌와 신경계의 작동33을 이해하려 했으며, 월터 피츠(Walter Pitts)와 함께 1943년에 발표한 "신경 활동에 내재된 아이디어의 논리적 계산" 32 논문은 인공 신경망의 이론적 기초를 놓았다.34

네그로폰테가 인용한 맥컬록의 1956년 논문(실제로는 1952/53년 강연이 1956년에 출판됨)의 정확한 제목은 "윤리적 로봇의 일부 회로를 향하여, 또는 인공물의 마음과 같은 행동에서 사회적 평가의 기원에 대한 관찰 과학 (Toward Some Circuitry of Ethical Robots or an Observational Science of the Genesis of Social Evaluation in the Mind-Like Behavior of Artifacts)"이다.36

맥컬록에게 '윤리(ethics)'란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의 로봇 3원칙처럼 미리 프로그래밍된 추상적 도덕률이 아니었다. 그에게 '윤리'란 "사회적 교류에서 발전하며 그 연합(association)에 의해 생성된 목적에 봉사하는 행동 양식" 36이었다. 이러한 '윤리'는 기계가 고립되어 존재할 때가 아니라, "협력과 경쟁"(cooperation and competition) 36을 하고 "노력과 보상을 공유"(share effort and reward) 36하는 '사회적' 맥락에 처할 때만 발생할 수 있다. 이 로봇들은 "자신들의 연합에 의해 생성된 목적" 36에 봉사하도록 "자기-규율(self-disciplined)" 36되어야 하며, 이는 "부정적 피드백"과 학습을 위한 "내부 폐쇄 루프" 36를 통해 달성된다.

네그로폰테의 '건축 기계'는 아시모프의 로봇이 아니라, 바로 맥컬록의 '사이버네틱-사회적' 로봇이다. 네그로폰테가 '건축 기계' 2를 '윤리적 로봇' 2이라고 부른 것은, 이 기계가 '건축가'라는 다른 지능체와의 '사회적 교류'(즉, '대안 3'의 상호 훈련 2) 속에서 행동을 학습하고 '자기 개선' 1해야 함을 의미한다. 건축 기계의 '윤리'는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건축가와 협력하여 그 '목적을 함께 생성' 36하는 것이다.

결국, '윤리적 로봇' 개념은 '주인-노예' 패러다임을 탈피하기 위한 철학적 필수 조건이다. '노예' 2는 윤리를 가질 수 없다. 노예는 오직 '명령'을 가질 뿐이며, 그 행동은 전적으로 외부(주인)에 의해 결정된다. 맥컬록의 '윤리적 로봇' 2반드시 '동료' 2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 '윤리' 자체가 '연합' 또는 '사회적 교류' 36에서만 발생하기 때문이다. 윤리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협력'하고 '보상을 공유' 36할 수 있는 자율성(agency)이 전제되어야 한다. 따라서 네그로폰테가 '윤리적 로봇' 개념을 도입한 것은, '주인-노예' 관계를 기술적으로뿐만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극복하고, '생성적인(generative)' 28 파트너십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VI. MIT의 실험실: 아이디어의 '더듬어 찾기' (URBAN5, HUNCH, SEEK)

 

네그로폰테의 이론은 단순한 공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MIT 건축기계그룹(AMG) 14의 구체적인 실험에서 "파생된 미래에 대한 추정" 2이었다. 그의 책은 이러한 "좋은 아이디어와 나쁜 아이디어를 모두 가지고 놀고 더듬는" 1 실험실의 기록이다.

핵심 테이블 2: AMG 주요 프로젝트와 '건축 기계' 이론의 관계

 

프로젝트 (연도) 핵심 기술 / 대상 네그로폰테 이론과의 관계 (탐구 대상) 한계 및 교훈
URBAN5 (c. 1967-73) CAD, 그래픽 인터페이스, 라이트 펜, 모드 기반 시스템 6 '두 동료' (대화): "기계와의 대화" 6를 시도. '객관적 거울' 6로서의 기계. (대안 2의 함정): "미리 결정된 서비스".21 경직된 상호작용.21 진정한 '지능'이나 '진화'에 도달하지 못함.21
HUNCH (c. 1972) 스케치 인식, AI 20 '상호 훈련' (이해): 인간의 "모호하고 부정확한" 20 입력을 기계가 '이해'하려는 시도. URBAN5의 '경직성'을 극복하려는 노력. 진정한 '대화' 20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 단계.
SEEK (1969-70) 로봇 팔, 환경 센싱, 실시간 반응, 살아있는 유기체 15 '진화하는 유기체' (환경): 기계와 생명체가 공존하는 사이버네틱 환경 15의 구현. (예측 불가능성): 정적 모델(기계)이 동적 유기체(저빌)를 감당할 수 없음.15 '대안 3'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증명함.

 

URBAN5: 대화 시도의 한계

 

앞서 3장에서 분석했듯이, URBAN5는 네그로폰테의 이론이 "특히... 파생된" 1 핵심 경험이다.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기계와 환경 설계 프로젝트에 대해 '대화'하는 것의 바람직성과 실현 가능성을 연구" 6하는 것이었다. 기계는 건축가의 "설계 기준과 형태 결정에 대한 객관적인 거울" 6 역할을 하도록 의도되었다. 하지만 그 '거울'은 '10피트 큐브' 6라는 경직된 프레임과 '모드' 6 기반의 상호작용이라는 한계를 가졌고, 결국 진정한 '대화'가 아닌 '대안 2'의 '기계 호환적' 독백에 그쳤다.21

 

HUNCH: 모호함을 이해하려는 시도

 

URBAN5의 "빈약한" 21 상호작용과 "설계에 적대적인" 20 경직성에 대한 직접적인 반작용으로, AMG는 'HUNCH' 40라는 스케치 인식 시스템을 개발했다. HUNCH의 목표는 URBAN5와 정반대였다. 즉, 사용자가 "인간 파트너에게 하듯" "그래픽적으로 자유롭고, 모호하며, 부정확" 20하게 스케치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기계는 사용자의 "wobbly lines"(불안정한 선) 20를 완벽한 직선이나 원으로 '교정'하는 대신, 충실히 기록하고 그 '의도'를 추론하려 시도했다. 이는 '대안 2'(기계 호환성)의 제약을 정면으로 돌파하고, '대안 3'(상호 훈련)의 핵심인 '이해'로 나아가기 위한 핵심적인 기술적 시도였다.

 

SEEK: 유기체 은유의 물리적 구현

 

'SEEK' 15는 아마도 AMG의 프로젝트 중 가장 문자 그대로 네그로폰테의 이론을 구현한 실험일 것이다. 1장에서 논의했듯이, 이 프로젝트는 '진화하는 유기체' 2라는 은유를 저빌이라는 실제 생명체 15를 통해 물리적으로 구현했다. 이 실험은 '건축가'(인간)와 '건축 기계' 2의 관계뿐만 아니라, '환경'(유기체)과 '기계'(피드백 시스템)의 관계를 탐구했다.16 이 실험의 '실패'(저빌이 기계를 압도함 15)는, 예측 불가능한 '삶'이 정적인 '계획'을 항상 앞선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대안 3'의 적응형, 진화형 파트너십의 필요성을 극적으로 증명했다.

 

결론: '답을 모르는 질문'의 유산과 '끝없는 시작'



'답'이 아닌 '질문'으로서의 유산

 

네그로폰테는 이 책이 "답을 찾고 싶은 사람" 1이나 "컴퓨터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 1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경고한다. 이는 아키텍처 머신의 진정한 유산이 '솔루션'이나 '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유산은 '인간과 기계가 진정으로 협력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18

네그로폰테가 제안한 '건축 기계'는 단순히 더 빠르고 효율적인 생산 도구(Tool of Production)가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인식론적 도구(Tool of Epistemology)이다. '답' 1을 제공하는 기계(대안 1, 2)는 사용자가 이미 알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생산 도구'에 불과하다. 반면 네그로폰테의 '건축 기계'(대안 3)는 건축가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질문을 하도록" 1 돕는다. 이는 기계가 건축가의 '인식론적 파트너'가 되어, 건축가 자신의 설계 과정, 즉 "생각에 대해 생각하도록" 7 자극하고 강제하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URBAN5가 "객관적 거울" 6이 되고자 했던 것도 이러한 인식론적 목표의 초기 형태였다.

 

'끝없는 시작'의 현대적 의미

 

"이 프로젝트는 시작만 있고, 끝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1

1970년 이 책이 출판된 이후, 건축 기술의 역사는 네그로폰테의 비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지난 50년간 건축계는 그가 지적으로 불모하다고 거부했던 '대안 1'17과, 창의성을 구속한다고 비판했던 '대안 2'21의 경로를 주로 따라 발전해왔다. 네그로폰테의 '대안 3'은 대부분 학문적 영역에 머무르며 소수의 실험 18 속에서만 그 명맥을 유지했을 뿐, 주류 기술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2020년대에 이르러, 제너레이티브 AI(Generative AI)의 등장은 1970년의 이 '시작'을 다시 현재로 소환하고 있다. URBAN5 21와 같은 초기 시스템은 '미리 결정된' 규칙에 묶여 있었지만, 현대의 제너레이티브 AI 23는 방대한 데이터로부터 '진화적'으로 학습하며, URBAN5가 실패했던 '상호작용적이고 반복적인 프로세스' 23를 비로소 가능하게 하고 있다.

"한 명의 인간 + AI = 두 명의 인간 팀" 22이라는 최근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연구 결과는, 네그로폰테가 50년 전에 상상했던 '두 동료' 2 또는 '사이버네틱 팀 동료' 22의 비전이 기술적으로 구현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현대의 AI 연구는 '인간-AI 시너지'(Human-AI synergy) 23, '팀 중심 AI'(team-centered AI) 42, '비선형적 AI 보조 도구' 43 등, 네그로폰테가 '상호 훈련', '탄력성', '성장' 2이라고 불렀던 바로 그 개념들을 탐구하고 있다.

따라서 니콜라스 네그로폰테의 아키텍처 머신은 1970년대의 유물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마주한 AI 파트너십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가장 강력하고 '끝없는' 이론적 프레임워크이다. 그가 말했듯이, 이 프로젝트는 이제 막 다시 '시작'되었으며 '끝'은 보이지 않는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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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Nicholas Negroponte - The Architecture Machine - Monoskop, 11월 13, 2025에 액세스, https://monoskop.org/images/1/1f/Negroponte_Nicholas_The_Architecture_Machine_197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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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Architecture Machine, 11월 13, 2025에 액세스, http://cast.b-ap.net/wp-content/uploads/sites/8/2011/09/negroponte-ArchitectureMachinelowrez.pdf
  9. Appendix | Toward a Living Architecture? | Manifold@UMinnPress, 11월 13, 2025에 액세스, https://manifold.umn.edu/read/untitled-f1773d15-0794-4df3-a4cb-44234533f676/section/5251d95e-7fd2-4122-b3f6-1f207661f589
  10. Can modern architecture be responsive? - RTF - Rethinking The Future, 11월 13, 2025에 액세스, https://www.re-thinkingthefuture.com/architectural-styles/a4173-can-modern-architecture-be-respons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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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Warren S. McCulloch Papers -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11월 13, 2025에 액세스, https://search.amphilsoc.org/collections/style/pdfoutput/Mss.B.M139-ead.pdf
  39. 6 Nicholas Negroponte and the MIT Architecture Machine Group: Interfaces to Artificial Intelligence - IEEE Xplore, 11월 13, 2025에 액세스, https://ieeexplore.ieee.org/document/8290860/
  40. URBAN 5's overlay and the IBM 2250 model 1 cathode-ray-tube used for... - ResearchGate, 11월 13, 2025에 액세스, https://www.researchgate.net/figure/URBAN-5s-overlay-and-the-IBM-2250-model-1-cathode-ray-tube-used-for-URBAN-5-Source_fig1_325475263
  41. Toward a Theory of Architecture Machines – Nicholas Negroponte - IAAC Blog, 11월 13, 2025에 액세스, http://legacy.iaacblog.com/maa2014-2015-advanced-architecture-concepts/2014/11/toward-a-theory-of-architecture-machines-nicholas-negroponte/
  42. Human-AI teams—Challenges for a team-centered AI at work - PMC - PubMed Central, 11월 13, 2025에 액세스, https://pmc.ncbi.nlm.nih.gov/articles/PMC10565103/
  43. Understanding Nonlinear Collaboration between Human and AI Agents: A Co-design Framework for Creative Design - arXiv, 11월 13, 2025에 액세스, https://arxiv.org/html/2401.07312v1

 

Part 1. 밀물과 껍데기: PropTech의 현주소와 본질의 부재

1.1. 서론: '물이 들어올 때'의 역설
최근 몇 년간 건축 및 부동산 산업은 '물이 들어오는' 시기, 즉 코로나 특수와 같은 거시적 환경 변화와 기술적 기회가 맞물린 변곡점을 맞이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PropTech(프롭테크) 분야는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산업의 고질적인 비효율성을 해결할 대안으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적 접근이 과연 산업의 본질적인 '내면'을 강화하고 있는가, 혹은 밀물을 타고 피상적인 '껍데기'를 바꾸는 데 급급한 것은 아닌가에 대한 근본적인 진단이 필요하다.
이러한 반응적 기회주의의 대표적 사례로 스페이스워크(Spacewalk)와 그 핵심 서비스인 랜드북(Landbook)을 들 수 있다. 스페이스워크는 "AI와 빅데이터 기술을 활용해 부동산 시장을 혁신"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PropTech 스타트업이다. 랜드북의 비즈니스 모델은 "AI 건축설계 및 부동산 가치평가 기술"을 통해 "토지와 건물의 가치를 예측"하고 , "최적의 수익 시나리오"를 제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들의 접근 방식은 명확한 '스콥의 한계(Scope Limitation)'를 보여준다. 랜드북의 AI는 "토지 가치의 최대화(maximization of land value)" 와 "예상 수익률 예측" 을 핵심 목표로 삼는다. 이는 특히 "서울 토지의 90%"를 차지하지만 "산업 전문가의 도움 없이는 개발이 어려운"  200평(660 제곱미터) 미만의 소규모 토지 시장의 '비효율성' 을 해결하는 데 집중된다. 즉, 랜드북의 AI 엔진(LBDeveloper) 이 수행하는 '건축설계 자동화'란, "다양한 건축 법규를 반영"하여  "허용 가능한 건물 외피를 계산"하고  "수익성" 을 검토하는 작업이다. 이는 건축의 복잡다단한 '사악한 문제(Wicked Problem)'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법규 검토와 최대 용적률 산정이라는 매우 명확하게 '길들여진(tame)' 문제를 푸는 데 한정된다. 

1.2. '수제 맥주' 비유의 해부: 피상적 자동화
이러한 현상은 "일반 맥주의 껍데기만 수제 맥주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적 은유와 정확히 일치한다. 맥주 산업에서 양조장의 "몸집이 커질수록", 즉 규모의 경제를 추구할수록, "맥주를 다루는 사람"(본질)과 "기계를 다루는 사람"(프로세스)이 분리되고, 생산은 "설비와 품질 위주의 프로세서"  중심으로 재편된다. 이 과정에서 '수제(craft)'라는 단어는 본질적 차별성이 아닌, "스토리를 더욱 쌓아가는 '해명과 창작'" 의 영역, 즉 마케팅과 브랜딩의 영역으로 전락한다. 
PropTech의 '껍데기(Wrapper)'는 "건축의 대중화(Mass Customization)" 와 "99%를 위한 건축" 이라는 매력적인 '스토리'다. 이는 '수제 맥주'라는 라벨과 동일한 기능을 한다. 하지만 그 내부의 '엔진(Engine)'은 법규 와 수익률 에 기반한 지극히 '기계적인' 프로세스다. PropTech는 '맥주를 다루는 사람'(본질적 건축가)의 창의적 작업을 자동화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기계를 다루는 사람'(효율화 및 품질 관리)의 작업, 즉 가치 평가와 법규 검토만을 고도화하고 있다. '크래프트'의 핵심이어야 할 건축적 본질과 창의성은 이 방정식에서 부재한다. 

1.3. '내력(內力)'을 향한 호소: 반응이 아닌 구축
따라서 "물이 들어오기 전에 내면을 키워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세면 버틴다"는 주장은 이러한 피상적 자동화에 대한 강력한 반론이다. 여기서 '내력(Naeryeok, Inner Strength)'은 구조공학에서 차용한 용어로, 외부의 '물결'(시장 수요, AI 기술 유행)에 휩쓸려 수동적으로 '반응(reacting)'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외압에도 견딜 수 있는 '본질적 역량'을 선제적으로 '구축(building)'해야 함을 의미한다.
본 보고서는 이 '내력'의 실체를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건축의 '내력'이란, 현재의 PropTech가 회피하고 있는 건축 고유의 '모호성(ambiguity)'을 다루는 능력에서 나온다. 이 모호성을 '절차적(procedural)'이고 '시스템적(systemic)'으로 해체하고 재구축하는 과정이야말로 건축이 AI 시대의 조류 속에서 버티고 나아가 흐름을 주도할 수 있는 유일한 '내면 강화'의 길이다.


Part 2. 근본적 진단: 건축의 모호성과 문화적 임피던스

2.1. '불친절한 업계': 모호성이라는 성채
건축이 '불친절한 업계 2위'로 지목되는 이유는, 업계가 "모호한 말들 뒤에 숨어" 전문가와 비전문가 사이에 의도적인 장벽을 구축해왔기 때문이다. 이 모호성은 특히 건축 교육 과정에서 체계적으로 주입된다. 교육 현장에서는 "구체적으로 건축을 어떻게 만드는지"(재료, 크기, 색상, 빛의 결정 원리)를 알려주기보다, 교수의 주관적 판단인 "아니래"(틀렸다)라는 피드백이 반복된다.
이러한 교육 방식의 핵심에는 '크리틱(Critique)'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건축 스튜디오의 크리틱은 교육의 중심적 방법론이지만, "모호하거나 취향 중심적(vague or taste-driven)" 으로 변질되기 쉽다. 비평 패널은 종종 "취향에만 근거한(based on taste alone)" 주관적 발언 을 쏟아내며, 이는 학생들에게 '방법론'이 아닌 특정 '취향'을 강요하는 "심판적(judgmental)" 행위('wrong', 'bad', 'rubbish') 가 된다. 
의 자기 고백적 연구는 이 과정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한 건축학도는 "평범하고 지루한(ordinary and boring)" 자신의 가족이 사는 집을 "미스 반 데어 로에-심플하지 않다"는 이유로 의문시하기 시작한다. 그는 "비율을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멀쩡한 박공지붕을 평지붕으로 바꾸자고 부모를 설득하며, "나의 취향, 언어, 행동이 변하고 있다... 건축가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낀다. 이 과정에서 그는 "가족의 나머지 구성원들과 반대"되는 입장에 서게 된다. 
이는 건축 교육이 의도적으로 학생들의 '보편적 선호도'를 "낮추고" , 전문가와 비전문가 사이의 "간극을 만드는 패턴" 을 주입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교육은 "재료, 크기, 색상, 빛"과 같은 '기초(fundamentals)'  대신, "모더니스트 혁신" 과 같은 특정 스타일을 배타적 '취향'의 언어로 체화시킨다. 이 '모호성'과 '배타성'이 바로 건축 업계가 구축한 성채의 실체이다. 

2.2. 문화적 임피던스 불일치 (The Cultural Impedance Mismatch): 건축가 vs. 코더
건축계에 내재된 이 모호성은 "건축과 코더들의 백그라운드가 너무 달라서 이어지기 어렵다"는 '문화적 임피던스 불일치(Cultural Impedance Mismatch)'의 근본 원인이다. "건축가들은 input을 정확히 정의 못한다"는 치명적인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임피던스 불일치'는 본래 소프트웨어 공학의 용어다. 개발자 커뮤니티와 데이터 전문가 커뮤니티 간의 "문화적 임피던스 불일치"는 "서로 다른 기술, 다른 배경, 다른 사고방식(Ways of Thinking, WoT), 다른 작업 방식(Ways of Working, WoW)" 에서 기인하는 "비기능적 정치"와 "어려움"을 의미한다. 
이 불일치는 건축 분야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컴퓨테이셔널 디자인(Computational Design)과 BIM(Building Information Modeling)과 같은 현대적 도구들은 "매우 잘 정의된(굉장히 잘 디파인 된)" 데이터를 요구한다. BIM은 "실제 건물 요소, 예컨대 건축 자재 및 성능 데이터" 를 기반으로 작동하며, 생성 디자인(Generative Design)은 "정의된 제약 조건(defined constraints)" 과 "사용자 정의 입력(user-defined inputs)" 을 전제로 한다. 시스템은 명확하고 정량화된 입력을 요구한다. 
하지만 건축가의 'Input'은 본질적으로 모호하다. 건축가들은 "의도와 디자인을 연결하기 위해 단어와 예술의 그래픽 언어에 의존"하며 , 그들이 다루는 핵심 디자인 요소는 "내러티브, 형태, 기능, 다중감각적 접근, 물질성, 공간"  등이다. 이는 컴퓨테이셔널 시스템 입장에서는 "모호한 범위 정의(ambiguous scope definitions)" 에 불과하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 격차가 아니라 *인식론적 단절(Epistemological Chasm)*이다. 건축 교육 은 '모호함'과 '주관적 취향'을 전문가의 핵심 역량으로 훈련시킨다. 반면, 컴퓨테이션 은 '명확하게 정의된 입력값'을 절대적 전제로 삼는다. Spacewalk와 같은 PropTech 는 이 단절을 해결하려 시도하는 대신, 건축가의 모호한 입력을 무시하고 법규와 수익률이라는 명확한 입력값만으로 작동하는 쉬운 길(껍데기)을 택했다. 이것이 바로 진단된 '스콥의 한계'의 본질이다. 


Part 3. '내력' 구축을 위한 이론적 토대: 건축의 절차적 역설계
건축의 '내력'을 구축하는 것은 이 모호성을 해체하고, 건축적 사유를 절차적(procedural)이고 시스템적(systemic) 언어로 재정의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방법론적 도구들은 이미 건축 이론의 역사 속에 존재해왔다. 크리스토퍼 알렉산더, 루돌프 비트코워, 피터 아이젠만, 리처드 세라의 작업은 '내력'을 구축하기 위한 핵심적인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다.

3.1. 생성 문법 (Generative Grammar): 크리스토퍼 알렉산더 (Alexander & Chomsky)
건축을 '규칙 기반(rule-based)' 시스템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는 크리스토퍼 알렉산더의 '시스템 생성 시스템(Systems Generating Systems)' 에서 정점에 달한다. 알렉산더는 "전체로서의 시스템"(System as a whole,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생성 시스템"(Generating system)을 명확히 구분한다. 그에게 "생성 시스템"이란 "부품들의 키트(a kit of parts)와 이 부품들이 결합되는 방식에 대한 규칙들(rules)"의 집합이다. 
알렉산더의 "관계형 메소드"와 조지 스티니(George Stiny)의 "형태 문법(Shape Grammars)" 은 "은유가 아닌 실제 생성 엔진(generative formal engine)"이다. 이 접근은 촘스키(Noam Chomsky)의 "생성 문법(Generative Grammar)" 과 맥을 같이 한다. 촘스키의 문법이 유한한 "논리적 규칙"을 통해 "무한한 수의 가능한 문장"을 생성하듯, 'Shape Grammar'는 건축 디자인을 생성하는 구문론적 규칙을 정의한다. 이는 '취향'과 '아니래'라는 주관적 피드백으로 점철된 건축 교육의 모호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절차적 해독제다. '내력'의 첫 번째 요소는 디자인을 '생성하는 규칙'을 명시적으로 정의하는 능력이다. 

3.2. 형식과 비율 (Format and Ratio): 루돌프 비트코워 (Wittkower & Palladio)
루돌프 비트코워(Rudolf Wittkower)가 '인본주의 시대의 건축 원리' 에서 수행한 팔라디오(Palladio)의 빌라 로툰다(Villa Rotonda) 분석은 개별 '오브제(object)'를 '시스템(system)'으로 해독한 선구적인 작업이다. 비트코워는 팔라디오의 빌라들을 "추상적 도식(abstract schemes)" 과 "기하학적 선점(geometrical preoccupations)" 의 체계로 분석했다. 
그는 팔라디오의 "직사각형 평면의 비율(ratios)"이 "음계(musical scales)" 라는 수학적 원리로 설명될 수 있음을 밝혔으며, 팔라디오가 "각 방 내부뿐만 아니라 방과 방 사이의 관계에서도 조화로운 비율을 사용" 했음을 증명했다. 
이 분석은 "같은 format(형식)인데 ratio(비율)가 다른 것"이 "parametric design"이라는 현대적 통찰과 정확히 일치한다. 비트코워의 분석 은 파라메트릭 디자인의 원형(prototype)을 역설계한 것이다.

I. 서론: 엔지니어의 황혼과 브리콜뢰르의 도래



A. '합리주의'의 두 가지 얼굴: 1920년과 2020년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건축은 '합리주의'라는 기치 아래 급진적인 사회 변혁의 도구로 소환되었다.1 1920년대의 모더니즘 운동(Modern Movement)은 건물의 '합리화(rationalization)'와 '산업화(industrialization)'를 통해 사회 개혁(social reform)이라는 유토피아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1 당시의 건축은 순수한 재정적 논리를 넘어, 새로운 사회 질서를 구축하려는 가치 지향적 실천이었다.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 건축 저널 OASE 119: Rationalism Revised가 동명의 주제를 다시 꺼내든 것은 1 이 '합리성'의 의미가 근본적으로 변화했음을 시사한다. 21세기의 새로운 합리주의는 이상(ideal)이 아닌 생존(survival)의 논리에 가깝다. 그것은 '제한된 재료 및 에너지 자원(limited availability of material and energy resources)'이라는 지구적 한계와 엄격한 '재정적 고려(financial considerations)'라는 현실적 제약에 기반한다.1

이러한 맥락의 변화는 건축의 핵심 행위를 '건설(Building)'에서 '수리(repairing)'로 이동시키는 패러다임의 전환(paradigm shift)을 야기했다.3 이 새로운 시대적 요구 앞에서, 건축가들은 스스로 '다른 역할을 재발명(reinvesting themselves in different roles)'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3

 

B. 논의의 핵심: 브리콜뢰르와 현상학적 합리성

 

본 보고서는 이처럼 '수리하는 건축가(the architect of repair)'로서 새롭게 요청되는 역할을, 프랑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가 그의 저서 《야생의 사고(The Savage Mind)》에서 제시한 '브리콜뢰르(bricoleur)'의 은유를 통해 분석하고자 한다.7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근대적 '엔지니어(engineer)'는 tabula rasa (백지상태) 위에서 선험적인 개념과 구조를 가지고 세계를 설계한다. 반면 '브리콜뢰르'는 "손재주꾼" 8 또는 "잡동사니" 10를 다루는 자로서, 이미 주어진 '파편'과 '자투리'의 집합과 대화하며 그것들을 재조합하여 새로운 질서를 창조한다.11 만약 20세기의 모더니스트 건축가가 '엔지니어'의 전형이었다면, 오늘날 기존 유산을 '수리'하고 '재배열'하며 '재맥락화'하는 동시대 건축가들은 '브리콜뢰르'의 모습에 가까워지고 있다.

나아가, 본 보고서는 이 "새로운 합리성"이 단순히 자원의 효율적 분배라는 기술적, 경제적 차원 12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핵심 가설을 탐구한다. 이 합리성은 '우리가 시공간을 인식하고 경험하는 방향이나 태도' 13 자체를 재정의하는, 보다 깊은 현상학적(phenomenological) 차원으로 확장되고 있다.

 

C. 연구 방법 및 범위

 

이러한 문제의식을 탐구하기 위해, 본 보고서는 다음의 구조로 전개된다.

첫째, 레비스트로스의 이론과 건축 현상학을 중심으로 이론적 틀을 구축한다.

둘째, 유럽의 선구적 실천, 특히 '수리의 윤리'를 급진적으로 보여준 라카통 & 바살(Lacaton & Vassal)의 작업을 분석한다.

셋째, 이러한 글로벌 담론이 한국의 특수한 도시 맥락(서울, 대구 등)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변용되는지 '적응형 재사용(adaptive reuse)' 사례를 통해 고찰한다.

넷째, '수리'의 이데올로기가 은폐하거나 야기할 수 있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15, 파사디즘(facadism) 16, 그리고 박물관화(museumification) 17와 같은 비판적 쟁점들을 검토한다.

최종적으로, 본 보고서는 이러한 이론적, 실천적, 비판적 고찰을 종합하여, 동시대 건축가에게 요구되는 '비판적 브리콜라주(Critical Bricolage)'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II. 용어의 명료화: '수정된 합리주의' 대(vs.) 역사적 '신합리주의'



A. 역사적 신합리주의(Neo-Rationalism)의 정의

 

본 보고서에서 다루는 '수정된 합리주의(Rationalism Revised)'라는 용어가 야기할 수 있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를 1970년대 유럽 건축 담론의 핵심이었던 '신합리주의(Neo-Rationalism)'와 명확히 구별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 신합리주의는 주로 이탈리아에서 알도 로시(Aldo Rossi)와 조르조 그라시(Giorgio Grassi)와 같은 건축가들에 의해 주도되었다.18 그들은 주세페 테라니(Giuseppe Terragni)의 합리주의 건축을 재평가하며 18, 모더니즘의 단순한 기능주의(functionalism)와 포스트모더니즘의 가벼운 절충주의 모두에 반대했다. 그들은 건축사의 '유형(type)'과 '유형학(typology)' 20, 도시의 '원형(archetype)', 그리고 장소의 고유한 정신인 'genius loci' 18와 같은 개념을 통해 건축의 자율적 언어와 도시의 역사적 연속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B. 신합리주의(Neo-Rationalism)와 수정된 합리주의(Rationalism Revised)의 근본적 차이

 

이 두 '합리주의'는 '역사'를 다루는 방식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본 보고서의 핵심 논지를 명확히 하는 데 중요하다.

알도 로시로 대표되는 '신합리주의'는 역사를 *개념적, 추상적 원천(conceptual source)*으로 사용했다.20 그들은 역사를 "건축 언어의 저장소" 20로 보고, 그곳에서 도시와 건축의 보편적 '유형(type)'을 추출하여 *새로운 건축물(new building)*을 창조하고자 했다. 이는 비록 역사적 형태를 참조하지만, 여전히 건축가의 선험적(a priori) 개념을 바탕으로 이상적인 형태를 구현하려 한다는 점에서 '엔지니어'의 작업 방식과 유사하다.21

반면, OASE 119가 제시하는 '수정된 합리주의'는 "수리(repairing)" 3라는 행위 자체에 집중한다. 이 접근법은 역사를 추상적 '유형'의 저장소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실체(physical fabric)*로 존재하는 기존 건물 자체를 작업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는 '엔지니어'처럼 개념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브리콜뢰르'처럼 주어진 재료(기존 건물)에서 출발하여 후험적(a posteriori)으로 작업한다.

따라서 '신합리주의'가 역사를 개념적으로 참조하여 새로 짓는 방식이라면, '수정된 합리주의'는 역사를 물리적으로 마주하며 고쳐 짓는 방식이다. 이 둘은 역사에 대한 태도와 실천 방식에 있어 명확히 구별되어야 한다.

 

C. 동시대의 비판: '레트로 스타일'로서의 신합리주의

 

자하 하디드 아키텍츠(Zaha Hadid Architects)의 대표인 패트릭 슈마허(Patrik Schumacher)는 이러한 과거 지향적 경향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는 신합리주의, 네오모더니즘, 미니멀리즘 등을 "레트로 스타일(retro-styles)" 22이라고 일축하며, 오늘날 건축이 기후 변화, 인종 차별, 탈식민주의와 같은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과도하게 몰두한 나머지 23, 혁신을 포기하고 "단순한 공예(mere craft)" 23의 상태로 퇴보했다고 주장한다.

슈마허의 이러한 비판은 역설적으로 본 보고서의 핵심 논의를 강화하는 지점이 된다. 그가 옹호하는 '파라메트릭시즘(parametricism)' 22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최적화된 형태를 생성하는, '엔지니어' 패러다임의 궁극적인 현대적 발현이다. 반면, 그가 "단순한 공예"라고 비판적으로 지칭한 바로 그 지점이, 레비스트로스가 '브리콜뢰르'를 "손재주꾼" 8이라고 정의한 개념과 정확히 일치한다. '수정된 합리주의'는 슈마허가 폄하하는 바로 그 '공예'로의 회귀를, 자원 고갈의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합리성으로 긍정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이다.

 

III. '엔지니어'의 유산: 수리의 대상이 된 모더니즘과 타불라 라사(Tabula Rasa)



A. 모더니즘의 '엔지니어'와 타불라 라사(Tabula Rasa)

 

1920년대 모더니즘 건축가는 레비스트로스가 정의한 '엔지니어'의 전형이었다. 그는 기능주의(functionalism) 24, 산업화1, 사회 개혁2이라는 명확하고 선험적인 '구조(structure)'를 가지고, '사건(event)', 즉 새로운 건축물과 도시를 창조하려 했다.21

이 '엔지니어'들의 핵심 방법론은 '타불라 라사(Tabula Rasa)', 즉 백지상태였다. 흥미롭게도 타불라 라사는 단순히 전쟁으로 파괴된 상태 26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포르투갈 코임브라 대학 도시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은 기존의 도시 조직을 의도적으로 제거하고 "백지상태(blank slate)" 26를 확보하려는, 국가 권력과 결합된 적극적인 "프로젝트 방법론(project methodology)" 26이었다. 기존의 것은 비합리적이고 비위생적인 과거로 치부되었으며, 엔지니어의 합리적 질서를 구현하기 위해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B. 기능주의의 역설: 적응의 대상이 된 유산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바로 그 '엔지니어'의 합리적 유산이 그 자체로 '수리'의 대상이 되는 역설적 상황에 처해 있다. 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의 보고서는 모더니즘 건축 유산을 보존하고 재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명확히 보여준다.24

모더니즘 건축물은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난제들을 안고 있다 24:

  1. 기능적 경직성 (Functional Rigidity):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 24는 원칙에 따라 특정 기능(예: 특정 용도의 사무 공간, 특정 방식의 주거)에 고도로 특화된 설계는, 시대가 변해 새로운 용도를 수용해야 할 때 "초기 시대의 건물보다 덜 유연(less flexible)" 24하게 만든다. 유연성이 부족한 건물은 기능적 노후화(obsolescence)와 철거의 위험에 직면한다.24
  2. 환경적 지속 불가능성 (Environmental Unsustainability): 이 건물들은 "무한한 에너지(inexhaustible energy)"의 시대에 설계되었다.24 따라서 현대의 엄격한 환경 성능 요구(난방, 냉각 효율)를 충족시키기 매우 어렵다.27 특히 거대한 유리 외벽(large expanses of glazing)은 종종 에너지 악몽이 된다.24
  3. 재료 및 규모의 문제 (Material and Scale): 당시 혁신적이었던 재료 중 일부는 현재 '유해 재료(hazardous materials)'로 간주된다.24 또한 "매우 거대한 규모(very large buildings)"는 그에 맞는 새로운 용도를 찾기 어렵게 만들며, 수리 자체의 '경제적 실행 가능성(economic viability)' 24을 낮춘다.24

이러한 난제들은 모더니즘 '기능주의'의 근본적인 역설을 드러낸다. 특정 시대의 '기능'에 대한 과도하고 합리적인 특화(overspecialization)가, 다른 시대의 '기능' 변화에 대응하는 적응적 합리성(adaptive rationality)을 원천적으로 방해하는 것이다. 1920년대의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이, 21세기의 가장 비합리적인 '유산'이 되어버린 셈이다.

 

C. 사례: 셰필드 파크 힐(Park Hill)의 실패

 

영국 셰필드에 위치한 파크 힐(Park Hill) 주거 단지(1961년)는 이러한 '엔지니어'의 이상과 실패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늘의 거리(streets in the sky)" 28라는 혁신적인 개념을 통해 전통적인 이웃 공동체 의식을 고층 주거에 이식하려 했던 이 야심 찬 프로젝트는, 전후 영국 모더니즘의 최고 성취 중 하나로 여겨졌다.28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 단지는 심각한 방치, 구조적 노후화, 그리고 복잡한 사회 문제에 직면하며 급격히 쇠퇴했다. 결국 파크 힐은 "모더니즘의 실패와 동의어(synonymous with the failure of modernism)" 28가 되었으며, 그곳의 거주자들은 사회적 낙인에 시달려야 했다.28 이는 '엔지니어'의 tabula rasa 프로젝트가 의도했던 사회적 이상과 달리, 물리적, 사회적으로 얼마나 처참하게 붕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가 되었다. 이 실패한 유산은 훗날 '브리콜뢰르'의 수리 대상이 된다 (V장, VIII장 참조).

 

IV. 이론적 전환: 건축적 은유로서의 《야생의 사고》



A. 브리콜뢰르(Bricoleur)와 엔지니어(Engineer)의 이항대립

 

모더니즘 '엔지니어'의 유산이 야기한 막다른 골목에서, 우리는 새로운 건축가의 초상을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The Savage Mind)》 8에서 발견할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적 사고(브리콜뢰르)와 과학적 사고(엔지니어)를 구분하며 두 가지 상반된 작업 방식을 제시한다.

  • 엔지니어(Engineer): 엔지니어 또는 '과학자'는 a priori(선험적) 30 방식으로 작업한다. 그는 명확한 '개념(concept)'과 '구조(structure)'를 먼저 설정한다. 그리고 그 프로젝트를 실현하기 위해 특별히 준비된 '원자재(raw materials)'와 '도구(tools)'를 동원하여 '사건(event)', 즉 결과물을 창조한다.7
  • 브리콜뢰르(Bricoleur): 반면, 브리콜뢰르 또는 '신화적 사고'는 a posteriori(후험적)이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whatever is at hand)" 9 작업한다. 그는 "인간의 노력에서 남겨진 자투리나 잡동사니(a collection of oddments left over from human endeavours)" 10, 즉 제한된 재료의 집합에 자신을 맞춘다. 그는 이질적인 재료와 파편들을 가지고 "대화"하며 21, 그것들이 가진 잠재력으로부터 새로운 '구조'를 창조한다.11

 

B. 건축적 실천으로서의 브리콜라주(Bricolage in Architectural Practice)

 

이 인류학적 은유는 건축 실천에 직접적으로 적용되어 왔다. 건축에서 브리콜라주는 "서로 다른 시대와 스타일의 건물들이 근접하여 만들어내는 뒤죽박죽한 효과(jumbled effect)" 31로 이해되거나, "손에 잡히는 모든 재료로 예술작품을 구축하는 행위" 32로 정의된다.

이미 콜린 로우(Colin Rowe)와 프레드 코터(Fred Koetter)는 그들의 저서 《콜라주 시티(Collage City)》에서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를 "고슴도치로 위장한 여우"라고 칭하며, 그가 건축사의 단편적인 아이디어들을 교활하게 조합하는 '브리콜뢰르'였다고 분석한 바 있다.31

그러나 본 보고서의 핵심 주장은, 건축에서 '브리콜라주'의 개념이 콜린 로우 시대의 은유적(metaphorical) 단계에서 동시대의 물리적(physical) 실천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로우의 시대에 '브리콜라주'는 건축사(history)라는 아이디어의 저장소에서 개념을 콜라주하는 설계론적 은유에 가까웠다.31 르 코르뷔지에는 여전히 새로운 건물을 짓는 '엔지니어'였지만, 그의 사고방식이 '브리콜뢰르'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는 비평이었다.

반면, OASE 119가 말하는 '수리'의 시대 3에 '브리콜라주'는 물리적 도시 구조 자체를 "손에 잡히는 재료"로 사용한다. 라카통 & 바살(Lacaton & Vassal), Architecten De Vylder Vinck Taillieu(ADDVT) 33와 같은 현대 건축가들은 기존 건물 자체를 '자투리(oddment)' 10로 취급하며, 아이디어가 아닌 물리적 실체를 "있는 그대로(making do)" 33 다룬다.33 즉, '브리콜라주'는 더 이상 설계 스튜디오 안의 지적인 은유가 아니라, 공사 현장의 구체적인 실천 방식이 되었다.

 

<표 1> 엔지니어 대 브리콜뢰르: 두 가지 건축적 실천 모델



구분 '엔지니어' (모더니즘 건축가) '브리콜뢰르' (현대 '수리' 건축가)
인식론 A Priori (선험적) 30 A Posteriori (후험적) 21
작업 방식 "개념(구조)에서 사건(재료)으로" 21 "사건(재료)에서 구조(개념)로" 21
재료에 대한 태도 프로젝트를 위해 특별히 준비된 원자재 7 "손에 잡히는 대로", "남겨진 자투리" 9
역사/유산과의 관계 Tabula Rasa. 극복의 대상, 제거의 대상 26 Spolia. 재활용, 재배열, 재맥락화의 대상 33
대표적 실천 김수근 (세운상가 초기 설계) 34 라카통 & 바살 (그랑 파크 보르도) 35

 

V. '수리'의 윤리학: 유럽의 브리콜라주 실천



A. 브리콜뢰르의 원형: 라카통 & 바살(Lacaton & Vassal)

 

프랑스 건축가 듀오 안 라카통(Anne Lacaton)과 장필립 바살(Jean-Philippe Vassal)의 작업은 동시대 '브리콜뢰르'의 전형을 보여준다.33 그들의 철학은 "기존의 것을 가지고 작업하기(working with the existing)", "도시 거주자들의 일상적 실천을 존중하기(valuing experiences of everyday urban life)", 그리고 "더 적은 것으로 더 많은 것을 하기(doing more with less)" 33로 요약될 수 있다.

이들의 실천을 관통하는 핵심 윤리는 "결코 파괴하지 않는다(Never demolish)" 36는 선언이다. 2021년 프리츠커상 수상 당시, 심사위원회는 이들이 "이미 존재하는 것을 소중히 여기고, 지속 가능하게 만들며, 덧붙임으로써 확장하고, 단순함의 사치를 존중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제안" 36한다고 평가했다. 이는 파괴와 신축이 야기하는 막대한 '탄소 비용(carbon costs)' 36과 기존 거주민들의 '사회적 단절(social breakage)' 38을 거부하는, 지속가능성에 대한 급진적이고 윤리적인 태도이다.

 

B. 급진적 실천 1: '아무것도 하지 않음(Doing Nothing)'의 정치학

 

'수리'의 윤리는 때로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라는 가장 급진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1996년 보르도의 레옹 오콕 광장(Place Léon Aucoc) 프로젝트 39가 그 시초이다.

당시 시 당국으로부터 광장 재개발을 의뢰받은 이들은, 현장을 관찰한 후 주민들이 이미 그 공간을 공원으로서 매우 잘 사용하고 있음을 발견했다.36 그들의 결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to do nothing)" 36이었고, 단지 기존의 나무와 벤치를 유지 보수하는 최소한의 개입만을 제안했다.39

이는 '수리'의 개념을 넘어, '탈성장 건축(Degrowth Architecture)' 39의 선구적 실천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자본주의 하의 건축은 본질적으로 '성장(growth)'을 전제로 한다.39 건축가는 통상적으로 '자본의 끝없는 성장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라카통 & 바살의 '아무것도 하지 않음'은 바로 이 전제 자체를 거부하는 "비상 브레이크를 당기는" 39 행위였다. 이는 브리콜라주가 단순히 낡은 재료를 재활용하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성장을 거부하고 기존의 사회적 이용 가치를 보존하는 정치적, 경제적 저항 행위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39

 

C. 급진적 실천 2: '덧붙이기(Addition)'를 통한 모더니즘의 완성

 

라카통 & 바살의 브리콜라주가 가장 빛을 발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엔지니어'의 실패한 유산인 모더니즘 사회주택을 다루면서였다. 파리의 투르 부아 르 프레트(Tour Bois le Prêtre) 36와 보르도의 그랑 파크(Grand Parc Bordeaux) 35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낡고 협소해진 1960년대의 콘크리트 슬래브 아파트 36파괴하는 대신, 기존 구조물 외부에 경량의 동계 정원(winter garden)과 발코니를 덧붙이는(add) 방식을 택했다.36 이 단순한 '덧붙이기'는 기존 거주민들의 주거 면적을 극적으로 확장하고, 채광과 조망을 개선하며, 바이오클라이머틱(bioclimatic) 발코니를 통해 에너지 효율까지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36

이는 '엔지니어'의 실패한 유산을 '브리콜뢰르'가 구원하는 서사로 읽힌다. 모더니즘 사회주택은 '사회 개혁'이라는 숭고한 이상1으로 시작했으나, 앞서 파크 힐의 사례 28처럼 열악한 물리적, 사회적 실패로 귀결되곤 했다.

이에 대한 기존의 대응 방식(철거 후 신축)은 '엔지니어'의 tabula rasa 논리를 반복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기존 거주민 공동체를 해체하고 축출하는 폭력을 수반한다.38

반면 라카통 & 바살은 "원설계자의 목표(aims of the original designers)"(즉, 모더니즘의 사회적 이상)와 "현재 거주자의 열망(aspirations of the current occupants)" 38을 동시에 존중한다. 그들은 거주민들이 이주하지 않은 상태에서 38 수리를 진행함으로써 사회적 단절을 막았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모더니즘이 가졌던 사회적 꿈을, 모더니즘이 해결하지 못한 환경적, 공간적 문제를 '덧붙이기'라는 브리콜라주 기법으로 '수리'함으로써, 21세기에 되살려냈다.36 '브리콜뢰르'가 '엔지니어'의 꿈을 완성한 것이다. 장필립 바살은 인터뷰에서 이러한 접근이 이념적 기능주의가 아닌, 표준화된 요소를 사용하는 '브리콜뢰르'의 방식에 가깝다고 인정했다.35

 

D. 사례: 파크 힐(Park Hill)의 '모더니즘 다시 쓰기'

 

III-C절에서 언급된 셰필드 파크 힐의 실패 역시 '수리'를 통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2000년대 이후 시작된 재활성화 프로젝트 28는 이 거대한 모더니즘 유산을 다루는 또 다른 브리콜라주 방식이다.

Hawkins\Brown, Studio Egret West, 그리고 Mikhail Riches와 같은 건축가들이 참여한 이 다단계 프로젝트는 "역사적 요소를 보존하고 향상"시키면서 "현대적 개입"을 도입했다.28 그들은 "원래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현대적 주거 요구를 충족시키려 했다.28 구체적으로는 상징적인 노출 콘크리트 파사드를 복원하는 한편, 낡은 창호는 에너지 효율이 높은 유닛으로 교체하고, 다채로운 양극산화 알루미늄 패널을 덧붙여 파사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28 이는 실패한 모더니즘 유산을 '재료를 통해 다시 쓰는(Rewriting Modernism Through Materials)' 28 행위이며, '엔지니어'의 엄격한 원본을 '브리콜뢰르'가 재해석한 사례이다.

 

VI. 맥락의 재구성: 한국 도시 조직 속 브리콜라주



A. 한국적 브리콜라주의 전사(前史)

 

유럽에서 '수리'의 윤리가 자본주의적 성장에 대한 반성, 혹은 모더니즘 유산에 대한 재해석으로 등장했다면, 한국의 맥락에서 '브리콜라주'는 전혀 다른 기원을 갖는다. 그것은 낭만적, 철학적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절박한 방식이었다.

한국전쟁 피난 시절, 사회 시스템이 붕괴된 상황에서 사람들은 "주변 산의 나무와 흙"을 채집하고, "미군 부대 부산물"이나 철도변의 자재들을 주워 집을 지었다.40 이는 사회적 혼란 속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생존 공간을 구축했던,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브리콜라주였다. 이러한 '만들어 쓰기'의 경험은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 과정에서 끊임없이 변형되며 도시 조직의 저변에 깔려있다.

 

B. 사례 1: 세운상가(Sewoon Sangga) - 사회적 브리콜라주

 

서울의 세운상가(1966년)는 이러한 중층적 맥락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저명한 건축가 김수근에 의해 설계된 세운상가는, 주거와 상업(제조업)이 복합된 1km 길이의 "획기적인 메가스트럭처" 34였다. 이는 당대 최고의 기술로 구현된 '엔지니어'적 유토피아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강남 개발 등에 밀려 급격히 쇠퇴하며 '실패한 유산'이 되었다.34

수십 년간 철거와 보존의 논란이 거듭된 후, 2015년부터 시작된 '다시·세운 프로젝트(Remaking Sewoon Project)' 34는 이 거대한 구조물을 '수리'하는 '브리콜뢰르'적 대응이다. 이 프로젝트는 끊어진 보행 데크(skywalk)를 재연결하고 공공 공간을 삽입하는 물리적 브리콜라주를 포함한다.34

하지만 이 프로젝트의 가장 급진적인 브리콜라주 시도는 물리적 수리가 아닌, 사회적 수리, 즉 '젠트리피케이션 방지'에 대한 명시적 노력이다.34

일반적으로 '적응형 재사용'이나 '도시재생'은 VIII-A절에서 상술할 젠트리피케이션 15을 유발하는 경향이 있다. 자본이 유입되고 환경이 개선되면 임대료가 상승하여 기존의 영세 상인이나 주민들이 축출된다.

세운상가 프로젝트는 이러한 부작용을 인지하고, 2016년 서울시와 상가 소유주, 임차인들이 "임대료 상승에 대항하여 임차인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협약(Anti-Gentrification Cooperation Agreement)" 34을 체결했다. 또한, 기존의 경공업(전자 수리, 인쇄, 금속 가공) 생태계를 "주변부로 몰아내는 대신" 34, 이들을 VR, 로보틱스, CNC 제조와 같은 신규 창작 산업과 "나란히(rubbing up against)" 34 공존시키려 시도했다.

이는 세운상가가 수십 년간 자생적으로 구축해 온 사회적, 산업적 생태계 자체를 '손에 잡히는 재료'로 인정하고, 이를 보존하며 재배열하려는 '사회적 브리콜라주'의 시도이다. 이는 물리적 형태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망까지 '수리'의 대상으로 삼는, 라카통 & 바살의 사회주택 리노베이션 38과도 맥을 같이하는 접근이다.

 

C. 사례 2: 대구 산업 유산 - 프로그램적 브리콜라주

 

대구광역시의 산업화 유산 재활용 사례 42는 '장소성'과 '공간적 특성'을 재료로 삼는 브리콜라주를 보여준다.

대구창조캠퍼스 (구 삼성전자 부지): 이 프로젝트는 산업화 시대에 "무시되었던 도시적, 건축적 맥락을 재연결"하고, "과거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42 프로그램을 통해 산업 유산을 대중과 소통시키고자 했다.42

이현 축적소 (구 곡물 및 비료 비축기지): 1970년대에 지어져 2017년 폐쇄된 이 거대한 산업 시설 44의 재활용은 '프로그램적 브리콜라주'의 전형을 보여준다.44 이 시설의 핵심 '재료'는 건물의 미학적 외관이 아니라, 그것이 제공하는 독특한 공간적 조건, 즉 "높은 층고와 넓게 트인 공간", 그리고 "거대하고 웅장한 구조물의 독창성" 44 그 자체이다.

만약 '엔지니어'적 관점에서 접근했다면, 이 "비합리적인" 층고와 거대한 규모는 '비효율적'이라 판단되어, 일반적인 공연장이나 상업 시설 44 규격에 맞게 분할되거나 철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브리콜뢰르'는 이 "비합리적인" 거대함을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자투리'로 인식한다. 그리고 이 독특한 공간적 조건에 맞는 새로운 프로그램(복합 문화 예술 활동과 거주 기능의 결합) 44발명해낸다. 이는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브리콜뢰르'가 "사건(기존 재료/공간)으로부터 구조(새로운 용도/프로그램)를 창조" 21하는 방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현 축적소는 UNESCO 음악 창의 도시 44라는 대구의 새로운 정체성과 결합하여, 낡은 산업 유산이 새로운 문화적 내러티브를 획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VII. 합리성의 재정의: 효율성을 넘어선 시공간의 현상학



A. 새로운 합리성의 필요성

 

라카통 & 바살의 '아무것도 하지 않음' 39이나 이현 축적소의 '거대한 비효율'을 긍정하는 44 태도는, 기존의 공학적, 경제적 합리성(engineering/economic rationality) 12의 잣대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는 '수정된 합리주의'가 단순한 자원 효율성을 넘어, '시공간을 인식하고 경험하는 태도' 13 자체의 변화와 맞닿아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건축 현상학(phenomenology)의 영역으로 우리를 이끈다.

 

B. '수리의 건축'과 가시적 흔적의 미학

 

이러한 태도 변화는 '수리의 건축(Architecture of Repair)' 46이라는 동시대 건축 운동에서 구체화된다. 이 운동은 "수리의 가시적인 흔적(visible signs of repair)" 46을 긍정하는 "급진적인 대안적 관점" 46을 제안한다.

기존의 관점에서 '수리'는 완벽을 추구하는 건축의 순수성을 해치는, 감춰야 할 '약함의 징후(sign of weakness)' 46였다. 그러나 이 새로운 관점은 수리의 흔적을 "건물의 이야기를 깊게 하고 풍부하게 하는" 46 긍정적인 내러티브로 수용한다. 수리된 건물은 영원히 pristine(원래 그대로의) 상태를 가장하는 대신, 시간의 경과와 변화를 적극적으로 껴안는다.

 

C. 건축 현상학과 '애착'의 합리성

 

이러한 태도 변화의 철학적 기저에는 건축 현상학(Architectural Phenomenology) 47이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 크리스티안 노르베르그-슐츠, 유하니 팔라스마 등에 의해 발전된 이 사조는, 건축을 단순한 기능적 오브제(object)가 아니라 "인간의 실존을 담는 그릇"이자 "우리의 감정, 기억, 세상에 존재하는 감각을 형성하는" 47 매개체로 본다.

건축 현상학은 '수리'라는 행위를 선택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설명해준다. 이는 '효율성'이 아닌 '애착(attachment)'에 기반한 합리성이다.

건축 현상학은 '촉각적 피드백(Haptic Feedback)'과 '정직한 재료의 노화(Honest material aging)' 같은 감각적 경험이 어떻게 지속가능한 행동으로 이어지는지 보여준다.47

  1. 개념 (Concept): "촉각적 피드백" (예: 손잡이의 무게감, 문지방의 마모).47
  2. 심리적 영향 (Psychology): 재료와의 감각적 교감을 통해 "깊은 물질적 애착(deep material attachment)"을 생성하고, "시간과 역사에 대한 연결"을 구축한다.47
  3. 행동 (Action): 이러한 애착은 자연스럽게 "교체보다 수리 및 유지보수를 우선" 47하게 만든다. 또한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소비자 순환(always new' consumer cycle)"과 "계획적 구식화(planned obsolescence)" 47를 거부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결론적으로, 이 새로운 합리성의 관점에서 '수리'는 단순히 비용을 절감하는 경제적 계산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재료와 맺는 촉각적, 감정적 유대47에서 비롯된 합리적 선택이다. 우리는 우리가 애착을 갖는 것을 수리한다. '브리콜뢰르' 건축가의 새로운 합리성은 바로 이 애착을 설계하고, 시간의 흔적을 존중하는 것이다.

 

D. 시공간 경험의 재정의

 

이러한 현상학적 합리성은 우리가 시공간을 경험하는 방식 자체를 바꾼다.

'엔지니어'의 tabula rasa 건축물(예: 르 코르뷔지에의 빌라 사보아에 설치된 위생적인 세면대 49)은 질병과 과거를 박멸하려는 위생적이고 추상적인, 단일한 시간(1927년)을 제공한다.

반면, '브리콜뢰르'의 '수리된' 건축물 46은 다층적인 시간(multi-layered time)을 전시한다. 그곳에는 원본의 흔적, 마모의 흔적(파티나), 그리고 수리의 흔적이 공존한다. 스위스 'Voie Suisse' 공원에서 예술가 카르멘 페린(Carmen Perrin)이 빙하가 밀어낸 바위를 '닦아내는(washing)' 행위 50는 그 자체로 "기억을 드러내는(uncovered memory)" 50 작업이었다. 이는 관찰자가 "예술작품 속으로 들어가" 51 시간성이 중첩된 공간, 즉 4차원적(tetradimensional) 51 경험을 하게 한다. 이는 뒤르켐(Durkheim)이 말한 "사회의 시공간 인식" 13이 건축을 통해 물리적으로 재구성되는 순간이다.

 

VIII. 비판적 반론: 브리콜라주의 함정과 '수리'의 이데올로기

 

'수리'와 '브리콜라주'는 그 자체로 윤리적이거나 진보적인가? '수정된 합리주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적응형 재사용(Adaptive Reuse)' 52은 종종 자본의 논리를 은폐하고 기존의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

 

A. 사회적 비판: '수리'로서의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가장 첨예한 비판은 '적응형 재사용'이 젠트리피케이션 15을 촉발하는 핵심 동력이라는 점이다.

미국 조지아주 사바나 예술 디자인 대학(SCAD)의 사례 41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SCAD는 도시 전역의 역사적인 건물들을 매입하여 '적응형 재사용' 방식으로 캠퍼스를 구축함으로써 도시를 "보존"하고 경제를 활성화했다는 찬사를 받았다.41

그러나 그 이면에는 어두운 현실이 존재했다. 이 과정은 대학 주변에 거주하던 "저소득, 저학력 아프리카계 미국인 인구" 41 공동체에 "해로운(detrimental)" 41 영향을 미쳤다. 학생 수요가 폭증하자 민간 개발업자들이 투기 목적으로 주택을 매입, 개조하며 임대료가 폭등했다.41 학생들과 달리 재정적 자원이 부족했던 원주민들은 "임대료 상승이나 강제 이주로 인한 사회적 외상(social trauma and inconvenience caused by displacement or increased rent)" 41에 직면했고, 결국 "시장에서 밀려나(priced out of the market)" 41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쫓겨났다.

이 맥락에서 '역사 보존'과 '적응형 재사용'은 20세기 중반의 폭력적인 "도시 재개발 운동(Urban Renewal Movement)" 41과 동일한, 혹은 "더 해로운" 41 결과를 초래하는 신자유주의적 축출의 도구로 작동했다. 이는 '보존'과 '수리'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한국의 도시재생 사업에서 나타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55와도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B. 진정성 비판: '수리'로서의 파사디즘(Facadism)

 

'수리'의 미학이 극단적으로 왜곡될 때, 이는 '파사디즘(Facadism)' 56으로 나타난다. 파사디즘은 역사적 건물의 '파사드(façade)', 즉 외피(껍데기)만 16 남기고, 내부 구조와 공간을 포함한 나머지 모든 것을 철거한 뒤 완전히 새로운 건물을 짓는 행위이다.16

개발업자들은 이를 '보존'과 '개발'의 현실적인 타협 16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이를 "역사적 완결성을 박탈하는" 16 "피상적인 몸짓" 16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파사디즘은 "조잡한 거짓말(crude lie)" 58이자 "건축적 사기(architectural sham)" 57로 비판받는다.

이는 '브리콜라주'의 완전한 왜곡이자 배신이다. 진정한 '브리콜뢰르'는 "자투리(oddments)" 10가 가진 내재적 구조와 잠재력을 존중하며 그것과 대화한다. 반면 '파사디스트(facadist)'는 기존 유산을 존중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미지(image) 외의 모든 것(구조, 재료, 역사, 공간 경험)을 경멸하고 파괴한다. 이는 '수리'가 아니라, 역사적 이미지만을 콜라주한 가장 교묘한 형태의 tabula rasa이다.

 

C. 문화적 비판: '수리'로서의 박물관화(Museumification)

 

'수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결말은 '박물관화(Museumification)'이다. 이는 살아있는 유산이나 문화를 그것이 속해 있던 본래의 삶과 맥락61에서 분리하여, 정적(static)이고 상품화된(commodified) 59 전시물로 전락시키는 현상을 말한다.60

런던의 로빈 후드 가든(Robin Hood Gardens) 17 사례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앨리슨 앤 피터 스미스슨(Alison and Peter Smithson)이 설계한 이 모더니즘 사회주택 단지(파크 힐과 유사한)는 철거 위기에 처했고, 수많은 건축가들의 보존 캠페인은 결국 실패했다.17

그런데 이 건물이 철거되기 직전, 런던의 V&A 박물관이 이 건물의 "3층짜리 파편(a segment)" 17을 "건축 컬렉션"으로 수집하는 결정을 내렸다.17

이는 '수리'가 아닌 '박제(taxidermy)'이다. '브리콜뢰르'(여기서는 큐레이터)가 '엔지니어'의 유산을 수리하여 삶을 지속시키는 대신, 그것을 수집하여 죽음을 확인한 것이다. 이 파편은 "주거로서의 사용 가치(use value as housing)"와 "도시적, 사회경제적 맥락" 17이 완전히 "박탈된(stripped)" 17 채, 박물관이라는 새로운 맥락 속 "정적 오브제(static object)" 17가 되었다. 이는 마크 피셔(Mark Fisher)의 말을 빌리자면, 박물관에 갇힌 문화는 이미 "소진된(exhausted)" 문화이며 "묘지(cemetery)" 17에 불과하다.

 

<표 2> 유산 재맥락화의 세 가지 함정: 비판적 분석



비판 유형 정의 (Definition) 핵심 메커니즘 (Mechanism) 대표 사례 (Case)
사회적 실패 젠트리피케이션 (Gentrification) 유산 보존을 명분으로 자본이 유입되어 원주민(저소득층)을 축출함 15 문화적 가치가 경제적 가치로 치환되며 임대료 상승 41
구조적 실패 파사디즘 (Facadism) 건물의 외피(파사드)만 남기고 내부와 구조를 모두 철거하는 행위 16 역사적 진정성(authenticity)을 파괴하고 이미지만을 상품화 57
문화적 실패 박물관화 (Museumification) 살아있는 유산을 본래의 맥락과 용도에서 분리하여 정적인 전시물로 만듦 60 사용 가치(use-value)를 제거하고 관광/전시 가치(exhibition-value)만 남김 17

 

IX. 결론: '비판적 브리콜라주(Critical Bricolage)'를 향하여



A. '합리주의의 귀환'에 대한 최종 답변

 

본 보고서는 "합리주의의 귀환(Rationalism Revised)" 1이 1920년대의 유토피아적 '엔지니어' 합리성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기존 유산의 파편 10을 다루는 '브리콜뢰르'적 합리성 9으로의 근본적 전환임을 논증했다.

이 새로운 합리성은 다층적이다. 그것은 (1) 자원의 한계에 대응하는 경제적 합리성이며, (2) 재료와의 '애착'을 기반으로 '수리'를 선택하는 현상학적 합리성 47이고, (3) 다층적 시간을 경험하게 하는 시간적 합리성 51을 모두 포함한다.

 

B. 브리콜라주의의 한계와 비판적 실천의 필요성

 

그러나 '브리콜라주'는 그 자체로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이 접근법은 때로 "혼란스럽거나(messiness)" "엄격함이 부족한" 62 임시방편으로 치부될 수 있으며 63, "확장 불가능한(non-scalable)" 64 해결책에 머무를 위험이 있다.33

더 심각한 것은, '브리콜라주'가 윤리적 성찰 없이 자본의 논리와 결합할 때, 그것은 가장 교묘한 파괴의 도구가 된다는 점이다. '수리'는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사회적 파괴41를, 파사디즘이라는 구조적 기만16을, 그리고 박물관화라는 문화적 박제17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할 수 있다.

 

C. 제언: 비판적 브리콜라주(Critical Bricolage)의 세 가지 축

 

따라서 동시대 건축가에게 요구되는 '수정된 합리주의'는, 이러한 모든 함정을 인지하고 성찰하는 '비판적 브리콜라주(Critical Bricolage)'여야 한다.

진정한 '브리콜뢰르' 건축가는 단순히 '손재주꾼'을 넘어, 다음 세 가지 축을 동시에 수행하는 '비판가'여야 한다.

  1. 물질적 브리콜라주 (The Material): "결코 파괴하지 않는다"는 윤리 36를 바탕으로, 기존의 물질적, 물리적 자원을 '수리'하고 '덧붙인다' (라카통 & 바살).
  2. 현상학적 브리콜라주 (The Phenomenological): '가시적 수리' 46와 '촉각적 경험' 47을 통해 애착과 기억, 즉 정지된 '유산'이 아닌 지속되는 '삶'을 설계한다.
  3. 사회적 브리콜라주 (The Social): '수리'의 과정이 공동체를 축출하는 도구가 되지 않도록,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협약' 34과 같은 사회적 장치를 함께 설계한다 (세운상가).

이 '비판적 브리콜라주'만이 1920년대 '엔지니어'의 합리성이 가졌던 사회 개혁의 이상2과, 21세기 '브리콜뢰르'의 합리성이 제공하는 자원과 경험의 존중47을 동시에 성취하는, 진정한 '합리주의의 귀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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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The Importance of Adaptive Reuse in Modern Architecture - W & B Prime, 11월 11, 2025에 액세스, https://wbprimeconstruction.com/adaptive-reuse/the-importance-of-adaptive-reuse-in-modern-architec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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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 How Architectural Façadism Keeps the Old New - Reliance Foundry, 11월 11, 2025에 액세스, https://www.reliance-foundry.com/blog/architectural-facadism
  58. Adaptive Reuse: Preservation's Next Argument - BENJAMIN COMPTON Miami University, Ohio - Association of Collegiate Schools of Architecture, 11월 11, 2025에 액세스, https://www.acsa-arch.org/proceedings/Annual%20Meeting%20Proceedings/ACSA.AM.93/ACSA.AM.93.14.pdf
  59. Museumification of Historical Centres: the Case of Frankfurt Altstadt Reconstruction, 11월 11, 2025에 액세스, https://d-nb.info/1329602803/34
  60. Full article: Navigating paradoxes in traditional architecture: balancing heritage, modernity, and urban social dynamics - Taylor & Francis Online, 11월 11, 2025에 액세스, https://www.tandfonline.com/doi/full/10.1080/13467581.2025.2579674
  61. Historical Buildings and Monuments as Cultural Heritage In Situ—Perspectives from a Medium-Sized City - MDPI, 11월 11, 2025에 액세스, https://www.mdpi.com/2571-9408/6/6/239
  62. Full article: The holistic bricolage research approach: advantages and barriers to its application at doctoral level - Taylor & Francis Online, 11월 11, 2025에 액세스, https://www.tandfonline.com/doi/full/10.1080/03098265.2025.2534138
  63. Add/React: Exercises in Pragmatic Bricolage - Association of Collegiate Schools of Architecture, 11월 11, 2025에 액세스, https://www.acsa-arch.org/proceedings/Fall%20Conference%20Proceedings/ACSA.FALL.14/ACSA.FALL.14.50.pdf
  64. Digital Bricolage and Its Limits: How Microenterprises Undertake Digitalization in Resource-Constrained Environments | Information Systems Research - PubsOnLine, 11월 11, 2025에 액세스, https://pubsonline.informs.org/doi/10.1287/isre.2023.0193
  65. exploiting limitations: examining the concept of “bricolage” in management studies through a bibliometric analysis - ResearchGate, 11월 11, 2025에 액세스, https://www.researchgate.net/publication/385882356_EXPLOITING_LIMITATIONS_EXAMINING_THE_CONCEPT_OF_BRICOLAGE_IN_MANAGEMENT_STUDIES_THROUGH_A_BIBLIOMETRIC_ANALYSIS

 

서론: 스펙터클 사회 속 건축적 의미의 위기



1. 현재의 문제의식

 

동시대 건축은 깊은 의미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정보화 시대는 건축 지식의 문턱을 낮추어 ‘정해진 답을 찾는 방법’에 관한 기술적 지식의 가치를 잠식하고 있으며, 건축가와 건축 학문은 이제 ‘세상에 없는 질문을 던지는 능력’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건축 공동체는 사회적 신뢰를 잃고 자본의 논리에 종속되거나 전문가주의적 권위에 안주하며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공멸’의 길로 들어설 위험에 처해 있다. 특히 현대 건축이 상실된 깊이를 ‘형식에 대한 담론’과 ‘작가 신화’라는 두 가지 위장술로 은폐하려 한다는 비판은 이 위기의 핵심을 찌른다.

본 논문은 이러한 동시대 건축의 조건이 단순히 양식이나 기술의 변화가 아닌, 그 가치가 점차 자본주의 경제 체제 내에서 재생산 가능한 이미지로서의 기능에 의해 결정되는 근본적인 구조적 전환의 결과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건축의 진정성(authenticity)은 이제 그 물리적 구축이나 사회적 기능이 아닌, 소셜 미디어를 통해 얼마나 효과적으로 유통되고44, 자본 축적에 기여하는 이미지-상품(image-commodity)이 될 수 있느냐에 의해 평가절하되고 있다. 이 현상을 본 논문은 ‘이미지-자본(Image-Capital)’의 지배로 규정한다. 이는 건축의 존재론적 의미 자체의 위기이며 1, 이 위기에 대한 비판적-윤리적 대응을 모색하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2. 이론적 성좌(星座)

 

이러한 위기를 분석하고 그에 대한 응답을 모색하기 위해, 본 논문은 세 명의 핵심 사상가—발터 벤야민, 존 러스킨, 만프레도 타푸리—를 하나의 ‘성좌(constellation)’로 소환한다. 이들은 동질적인 사상가가 아니며, 오히려 그들의 상이한 관점들이 서로를 비추고 긴장을 형성할 때 문제의 다층적 본질이 드러난다.

  •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이미지의 부상에 대한 미학적-역사적 진단을 제공한다. 그의 ‘아우라(Aura)’ 개념은 건축이 기술복제시대를 거치며 어떻게 그 고유한 현존감과 역사성을 상실하게 되었는지를 분석하는 출발점이 된다.1 그는 ‘제의가치’에서 ‘전시가치’로의 이행을 통해 예술의 기능이 제의에서 정치로 이동한다고 보았다.2
  • **존 러스킨(John Ruskin)**은 잠재적 대응을 위한 윤리적-도덕적 틀을 제공한다. 그의 ‘진실의 등불(The Lamp of Truth)’은 재료와 노동의 정직성 4을 통해 건축의 타락에 저항할 수 있는 도덕적 나침반을 제시한다.
  • **만프레도 타푸리(Manfredo Tafuri)**는 앞선 두 사상가의 논의를 복잡하게 만들고 현실에 단단히 발붙이게 하는 정치경제학적 비판을 제공한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건축이 진정으로 비판적이거나 윤리적일 수 있는지 그 가능성 자체를 근본적으로 질문한다.6

 

3. 논증과 구조

 

본 논문은 동시대 건축이 ‘이미지-자본’의 논리 아래 진정성의 위기를 겪고 있으며(제1장), 이에 대한 윤리적 대응은 러스킨적 이상과 타푸리적 현실 사이의 해결 불가능한 긴장, 즉 '아포리아(aporia)'를 직시하는 데 있음(제2장)을 논증한다. 나아가 이 위기는 가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디지털 '문턱(threshold)'에서 새로운 양상을 띠며(제3장), 이에 대한 궁극적인 실천은 유토피아적 형태 만들기가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탈신비화(demystification)'하는 비판적 과정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는 '의식 있는 주체(conscious subject)' 7로서 건축가 자신의 '자기 이야기(self-story)' 9를 구축하는 데 있음(제4장)을 주장한다.

논문은 총 4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제1장은 벤야민, 드보르, 보드리야르의 이론을 통해 건축의 ‘아우라’가 어떻게 상업적으로 조작된 ‘하이퍼-아우라(Hyper-Aura)’로 변질되는지 진단한다. 제2장은 러스킨의 윤리적 명령과 타푸리의 정치적 리얼리즘 사이의 긴장 속에서 동시대 건축 윤리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제3장은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공간적 조건, 즉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서 건축의 역할이 어떻게 재정의되는지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제4장은 타푸리의 비판 이론을 통해 역사와 이론의 역할이 실무를 위한 도구가 아닌, 이데올로기 비판을 위한 것임을 밝히고, 이를 통해 건축가 개인이 구축해야 할 ‘자기 이야기’의 토대를 마련한다.


제1장: 사라지는 아우라: 이미지-자본으로서의 건축

 

이 장은 동시대 건축이 처한 상황을 진단한다. 발터 벤야민이 예술에서 목격한 ‘아우라’의 소멸이 건축에서는 공백으로 남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 축적을 목적으로 스펙터클 사회 내에서 제조된 초현실적이고 기만적인 ‘하이퍼-아우라(Hyper-Aura)’로 대체되었음을 주장한다.

 

1. 제의가치에서 전시가치로: 건축적 아우라의 변용

 

발터 벤야민에게 ‘아우라(Aura)’는 예술작품이 지닌 시간과 공간 속 유일무이한 현존감(presence), 그 역사성과 진품성(authenticity), 그리고 전통과의 연계에서 비롯되는 고유한 분위기다.1 전통 사회의 예술작품은 특정한 제의(ritual)적 맥락 속에서 기능하며 강력한 ‘제의가치(cult value)’를 지녔다.2 건축물, 예를 들어 성당이나 신전은 특정한 장소에 고정되어 제의적 기능을 수행하며, 그 존재 자체가 대중에게 '전시'되는 것보다 중요했다.2

그러나 사진과 같은 기술복제 기술의 등장은 이러한 아우라를 붕괴시켰다.1 기술복제는 예술작품을 그것의 고유한 시공간적 맥락과 전통으로부터 분리시킨다.12 건축물은 이제 그 장소로부터 분리되어 이미지로 대량 복제되고 유통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로써 제의가치는 점차 ‘전시가치(exhibition value)’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2 벤야민이 지적했듯, 진품성의 척도가 효력을 잃는 순간 예술의 사회적 기능은 제의에서 정치로 그 기반을 옮기게 된다.2 수정궁(Crystal Palace)은 이러한 전환을 상징하는 건축사적 사건으로, 수공예적 생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던 아우라가 산업적 생산 방식과 전시를 목적으로 하는 건축의 등장으로 인해 소멸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벤야민은 이 과정을 양가적으로 보았다. 한편으로 아우라의 붕괴는 전통적 문화유산의 가치를 청산하고 사물의 보편적 평등성을 추구하는 민주적, 정치적 잠재력을 지닌다.2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예술이 제의에서 해방되어 정치로 나아가지 못할 때, 정치가 거꾸로 '미학화'되는 파시즘의 위험을 경고했다.13 본 논문은 벤야민이 예견한 '정치화'가 21세기 자본주의 하에서 '정치'가 아닌, 자본의 일방적인 자기 현시인 '스펙터클'로 귀결되었음을 보이고자 한다. 아우라가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것은 정치가 아니라, 자본의 논리에 완벽하게 포섭된 '전시가치'의 극단적 형태다.

 

2. 스펙터클의 건축: 배경으로서의 도시

 

아우라가 사라진 자리를 채운 것은 기 드보르(Guy Debord)가 설파한 ‘스펙터클(Spectacle)’의 논리다. 스펙터클은 단순히 이미지의 집합이 아니라, “이미지에 의해 매개되는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 그 자체다.14 그것은 현실 사회의 비현실성의 심장부이며 14, 지배 질서(자본주의)가 자신을 정당화하는 끝없는 독백이다.16 스펙터클은 모든 삶을 '분리(separation)'시키고 소외시킨다.16

스펙터클 사회에서 건축과 도시의 주된 역할은 삶의 경험을 구체적으로 형성하는 것에서 벗어나, 기존 체제를 정당화하는 화려한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으로 전환된다. 드보르와 상황주의자들에게 도시(Urbanism)는 스펙터클이 펼쳐지는 핵심 무대이자 통제 장치다.18 도시는 자본주의적 개발을 위한 영토이자 20, 도시 생산 과정에 의해 위험하게 결집된 노동자들을 원자화하고 통제하는 장치로 변모한다. 이 단계에서 건축은 스펙터클의 '배경(backdrop)'으로 기능한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이러한 드보르의 비판을 더욱 급진화하여 ‘시뮬라크르(simulacra)’와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 개념을 제시한다.21 시뮬라크르는 더 이상 원본을 갖지 않는 복제이며, 하이퍼리얼리티는 실재가 시뮬레이션에 의해 대체되어 더 이상 실재와 가상의 구분이 불가능해진 상태를 의미한다.23 보드리야르에게 이 상태는 실재가 사라진 '무의미'의 상태이며, 디즈니랜드가 대표적인 예다.25

보드리야르가 퐁피두 센터(Centre Pompidou)를 비판하며 지적했듯 26, 건축은 이제 스펙터클의 '배경'이 아니라 스펙터클을 생산하는 '엔진(engine)' 그 자체가 된다. 그는 퐁피두 센터가 문화를 생산하고 전시하는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문화적 에너지를 '흡수'하고 '소각'하는 거대한 시뮬레이션 기계라고 비판했다.28 그곳의 위생학적이고 말끔한 하이테크 디자인은 내부의 문화적 기능을 가장한 채 사실상 정신적 공허를 만들어내는 장치로 작동하며 27, 건축 자체가 하이퍼리얼리티의 기념비가 된다. 건축은 이제 실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이미지를 생산하며 스펙터클의 논리를 완성하는 핵심적 도구가 된다.

 

3. 사례 연구: ‘인스타그램적 공간’과 공간 인플루언서

 

벤야민, 드보르, 보드리야르의 추상적 이론은 동시대의 구체적인 현상, 즉 소셜 미디어 유통을 목적으로 명시적으로 설계된 상업 공간의 부상 속에서 현실화된다. 특히 한국의 아이웨어 브랜드 ‘젠틀몬스터(Gentle Monster)’의 플래그십 스토어 ‘하우스 도산(Haus Dosan)’은 이러한 경향을 분석하기 위한 최적의 사례다.29 이 공간은 전통적인 상품 판매 공간을 넘어, 브랜드의 정체성을 전달하는 몰입적 경험(immersive experience)과 감각적 여정(sensory journey)을 제공하도록 설계되었다.32

방법론: 본 사례 분석은 두 가지 축으로 진행된다.

1. 기호학적 분석 (Semiotic Analysis)

'하우스 도산'은 어떻게 기호 체계로서 작동하는가? 이 공간은 상품(안경) 자체의 기능적 가치보다는, '브랜드 정체성'이라는 추상적 가치를 전달하는 기호의 집합체로 구성된다.

  • 기표 (Signifier):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들, 즉 날것의 콘크리트, 의도적으로 연출된 폐허 같은 마감 30, 3층에 전시된 거대한 6족 보행 로봇 '프로브(The Probe)' 36, 그리고 지하의 기괴한 형태의 디저트(Nudake) 31 등이 기표로 작동한다.
  • 기의 (Signified): 이러한 기표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 즉 '미래지향성', '예술성', '실험정신', 'Unopened: Future'라는 매장 테마 30 등이다.
  • 분석: 핵심은 기표와 기의의 자의적 연결에 있다. 거대한 6족 보행 로봇(기표)은 안경(상품)의 기능과 아무런 논리적 연관성이 없다. 그것은 오직 젠틀몬스터라는 브랜드가 지향하는 '실험정신'과 '미래'라는 추상적 가치(기의)를 전달하기 위한 순수한 기호로 존재한다. 방문객은 상품을 소비하기 이전에, 공간이 발산하는 기호를 소비하며 39 브랜드의 일부가 된다. 이는 보드리야르가 퐁피두 센터가 '문화'가 아닌 '문화의 시뮬레이션'을 수행한다고 비판한 것 28과 정확히 일치한다.

2. 현상학적 분석 (Phenomenological Analysis)

방문객은 이 공간을 어떻게 신체적으로 경험하는가? 이 분석은 방문객의 체험적 관점에 집중하며, 특히 두 가지 핵심 개념을 통해 심화된다.

  • 전이공간 (Transitional Space): '하우스 도산' 1층은 의도적으로 상품 판매의 기능과 효율을 포기하고, 마치 철거 직전의 폐건물처럼 연출되었다.30 이러한 낯선 공간과의 마주침은 방문객의 일상적 감각을 교란시킨다. 이는 종교 건축의 전이공간(narthex)이 방문객을 세속적인 일상 공간으로부터 분리하고, 내부의 ‘성스러운’ 공간 경험을 위해 심리적으로 준비시키는 역할과 유사하다.40 방문객은 이 "이동시키는(transportive)" 공간 40을 통과하며 기존의 인식을 재고하고 새로운 감각적 체험을 예비하게 된다.39
  • 주체적 시간성 (Subjective Temporality): 3층의 거대한 로봇 '프로브' 37와 미래적인 분위기는 객관적인 시간의 흐름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방문객에게 시공간을 초월한 듯한 비일상적 경험을 제공한다. 이것은 종교 공간에서 신적인 것을 체험할 때 발생하는 주관적 시간성과 유사하다. 방문객은 강렬한 시각적, 청각적, 감각적 충격을 통해 일상적 시간 감각에서 벗어나, 브랜드가 연출하는 초월적 서사 속에 몰입하게 된다.

이러한 공간에서 이미지 생산과 소비의 순환을 완성하는 주체는 바로 ‘공간 인플루언서’다. 이 공간들은 명시적으로 '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한(Instagrammable)' 장소로 설계되었으며 41, '공간 인플루언서'들은 이 정교하게 연출된 공간을 자신의 소셜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재생산하고 전파한다.43 그들은 이 공간의 상업적 가치를 검증하고 증폭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44 벤야민의 '제의가치'가 사제에 의해 매개되었다면, '하우스 도산'의 상업적 제의는 인플루언서라는 새로운 사제에 의해 매개되고 전파된다. 그들은 이 시뮬레이션을 '간증'(포스팅)하고 대중의 욕망을 그곳으로 인도하며, 그 대가로 '좋아요'(사회적 자본)를 획득한다.

 

4. 새로운 베일: 하이퍼-아우라(Hyper-Aura)의 등장

 

이 장의 분석을 종합하여, 본 논문은 핵심적인 이론적 주장을 제기한다. ‘인스타그램적’ 건축의 문제는 단순히 벤야민적 아우라의 부재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기만적이지만 강력한 새로운 아우라, 즉 **하이퍼-아우라(Hyper-Aura)**의 창조에 있다.

이 개념은 다음과 같은 논리적 귀결을 통해 도출된다.

첫째, 벤야민의 원본적 '아우라'는 진품성, 역사성, 그리고 '제의가치'에 뿌리를 둔다.2

둘째, 기술복제는 이를 해체하고 '전시가치'를 전면에 내세운다.1

셋째, 드보르와 보드리야르가 묘사한 사회에서는 이미지와 시뮬레이션이 실재보다 더 강력한 현실, 즉 '하이퍼리얼리티'가 된다.15

넷째, ‘하우스 도산’과 같은 체험적 상업 공간은 단순히 상품을 전시하는 것을 넘어, 강력하고 감성적이며 유일무이해 보이는 '경험(experience)'을 창조하도록 설계된다.32

다섯째, 이 제조된 경험은 새로운 종류의 아우라로 기능한다. 그것은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현장성, 브랜드 서사라는 (인위적) 역사성, 그리고 진정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진정성'을 모방한다.12

여섯째, 그러나 이 아우라의 핵심 가치는 물리적 만남이 아니라 인스타그램과 같은 플랫폼에서의 디지털 '복제'와 '유통'을 통해 실현된다.44

일곱째, 따라서 이것은 하이퍼-아우라다. 그 진정성은 시뮬레이션이며, 그 유일성은 대량 복제를 위해 설계된 것이다.

하이퍼-아우라는 스펙터클과 기호학을 통해 세심하게 조작된 시뮬레이션된 아우라로서, 진정성 있고, 유일하며, 초월적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무한히 복제 가능하며 순수하게 상업적 목적에 복무한다. 그것은 자신의 복제를 위해 설계된 아우라다. 그것은 상품인 동시에 소실점이다. 이 개념은 기술복제시대에 아우라가 단순히 종말했다는 통념이 가진 모순을 해결하고, 동시대 건축이 아우라를 어떤 방식으로 위장하고 전유하는지를 설명하는 새로운 분석틀을 제공한다.

 

구분 발터 벤야민 '아우라' 기 드보르 '스펙터클' 장 보드리야르 '하이퍼리얼리티' 본 논문 '하이퍼-아우라'
핵심 가치 제의가치 (Cult Value) 전시가치 (Exhibition Value) 기호가치 (Sign Value) (시뮬레이션된) 체험가치 (Experiential Value)
원본과의 관계 원본의 현존 (Presence) 원본의 소외 / 분리 (Alienation) 원본의 소멸 (Disappearance) 원본의 상업적 모방 (Simulation)
매개 방식 전통, 제의 (Ritual) 이미지 (Image) 시뮬라크르 (Simulacra) 몰입형 공간 (Immersive Space)
복제의 역할 아우라의 파괴 사회적 관계의 매개 실재의 대체 아우라의 완성 (목적)
건축적 예시 성당, 신전 스펙터클 도시 (배경) 퐁피두 센터 (기계) 젠틀몬스터 '하우스 도산' (체험)
         

제2장: 디지털 시대의 진실의 등불: 건축 윤리의 재검토

 

이 장은 1장에서 진단한 '하이퍼-아우라'의 기만에 맞서, 실천을 위한 윤리적 토대를 모색한다. 동시대 건축 윤리는 존 러스킨의 도덕적 명령과 만프레도 타푸리의 정치경제학적 리얼리즘이라는 양극단의 어려운 지형 사이에서 길을 찾아야 함을 주장한다.

 

1. 러스킨의 명령: 노동과 재료의 정직성

 

본 절은 존 러스킨(John Ruskin)의 『건축의 일곱 등불 (The Seven Lamps of Architecture)』에 나타난 ‘진실의 등불(The Lamp of Truth)’과 『베네치아의 돌 (The Stones of Venice)』의 관련 개념들을 심도 있게 분석한다.5 러스킨에게 건축의 '진실'은 선택이 아닌 도덕적 명령이었다. 그는 "우리는 정직한 건축을 명령할 수 있다"며 "기만의 비열함"을 경멸했다.48

러스킨이 비판한 건축적 기만은 구체적으로 세 가지로 분류된다 4:

  1. 구조적 기만 (Structural Deceit): 실제 구조가 작동하는 방식과 다르게 암시하는 것. 예를 들어, 하중을 받지 않는 펜던트 장식이나, 철골 기둥을 돌로 감싸 마치 돌 기둥이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행위다.49
  2. 표면의 기만 (Surface Deceit): 한 재료를 다른 재료처럼 보이게 칠하거나 위장하는 것. 예를 들어, 나무를 대리석처럼 보이게 칠하는 행위다.49
  3. 제작 방식의 기만 (Operative Deceit): 기계로 만든 장식이나 주조물을 마치 손으로 만든 수공예품처럼 보이게 속이는 것.4

러스킨 주장의 핵심은 단순히 '가짜' 재료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 제작자, 재료, 그리고 최종 형태 사이의 도덕적, 정신적 연결에 있다. '진실'이란 재료의 정직성을 넘어, 그 안에 투입된 인간 노동의 정직성에 관한 문제다. 그는 『베네치아의 돌』에서 고딕 건축의 위대함이 '불완전함'에 있으며, 이는 노동자가 '생각하는' 주체로서 자신의 노동에 참여했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47 그는 "노동을 통해 사유가 건강해지고, 사유를 통해 노동이 행복해질 수 있다" 47고 주장하며, 노동자가 단순한 '조작원(operative)'이 아닌 '사상가'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가 비판한 '제작 방식의 기만'은 미학적 속임수일 뿐만 아니라, "인간 노동의 부재" 52를 통해 노동을 비인간화하는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 그 자체에 대한 윤리적 비판이다. 그가 "돈 냄새가 나거나" "한심한 상태와 대충 타협하는" 작업을 맹렬히 비판하고 14, '최소 비용으로 최대 결과'를 내려는 "현대의 감정"에 맞서 '희생의 등불(Lamp of Sacrifice)' 4을 내세운 것은, 1장에서 분석한 '이미지-자본'의 효율성 논리에 대한 완벽한 윤리적 대척점을 이룬다.

 

2. 글로벌 생산 시대 ‘효율성’의 기만

 

본 절은 러스킨의 19세기적 이상을 21세기의 현실에 비추어 검토한다. 글로벌 공급망, 디지털 패브리케이션(CNC, 3D 프린팅) 55, 복합 신소재의 시대에 '진실의 등불'은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러스킨이 비판한 '제작 방식의 기만'(Operative Deceit) 54은 디지털 시대에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19세기의 기계 장식이 "인간 노동의 부재" 52로 인해 가치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디지털 제작(Dfab)과 로봇 공학 57은 이 '인간 노동의 부재'를 건축 생산의 기본값으로 설정한다.

디지털 제작은 '복잡한 형태의 자유' 56, '효율성' 59, 그리고 '지속가능성'(재료 폐기물 감소 등) 60을 약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약속은 러스킨의 관점에서 볼 때 새로운 형태의 '기만'을 은폐할 수 있다.

  1. 노동의 기만: 러스킨이 "인간의 손" 52과 "생각하는 노동자" 47의 가치를 강조했다면, 디지털 제작은 노동을 '알고리즘'과 '로봇 팔'로 대체한다.57 이는 러스킨이 비판한 '제작의 기만'의 극단적 형태다. "로봇 팔을 윤리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있는가?" 56라는 질문은 러스킨적 질문의 현대적 번역이다.
  2. 효율성의 기만: 21세기 '제작 방식의 기만'은 '로봇이 손처럼 보이게' 속이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은 '효율성'과 '지속가능성' 60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그 기술을 뒷받침하는 글로벌 공급망의 착취적 노동 현실 65이나 자동화로 인한 사회적 영향 58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dematerialize) 것이다. '효율성'이라는 가치 자체가 러스킨이 지키려 했던 '노동의 진실성'에 반하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기만'이 될 수 있다.

 

3. 비판적 주체로서의 건축가: 타푸리의 리얼리즘

 

본 절은 러스킨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도 상호보완적인 만프레도 타푸리(Manfredo Tafuri)의 관점을 도입한다. 러스킨이 '도덕적 선택'의 문제를 제기하는 곳에서, 타푸리는 '구조적 결정론'을 발견한다.66

타푸리의 핵심 논지는 『건축과 유토피아(Architecture and Utopia)』 67에서 명확히 드러나듯, 자본주의 발전의 논리 속에서 건축은 혁명적이거나 유토피아적인 힘을 상실했다는 것이다.8 사회에 '형태를 부여'하려는 건축의 모든 시도(아방가르드를 포함하여)는, 그것이 비판하고자 하는 체제(자본주의)에 결국 봉사하게 되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에 불과하다.6

러스킨이 건축가에게 '정직한 장인'이 될 것을 요구했다면, 타푸리는 현대 건축가를 자본의 '이데올로그(ideologist)' 67로 규정한다. 타푸리에게 건축가의 역할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체제 내에서 자신의 제약된 위치 7를 이해하고 건축 이데올로기의 '탈신비화(demystification)' 7를 수행하는 지식인, 즉 비판적 주체(critical subject) 6가 되는 것이다. 타푸리는 건축이 자본주의라는 '현실'을 외면하고 순수한 '형식'이나 '자율성'으로 도피하려는 모든 시도를 비판한다.7

 

4. 모순 속의 실천: 동시대적 윤리를 향하여

 

본 절은 이 장의 핵심적인 종합을 시도한다. 러스킨과 타푸리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대신, 둘을 생산적인 긴장 관계 속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러스킨의 도덕주의와 타푸리의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명백한 모순 74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바로 동시대 건축가가 처한 윤리적 딜레마, 즉 '아포리아(aporia)' 그 자체를 정의한다. 오늘날 의미 있는 윤리란 일련의 규칙이 아니라, 이 모순을 의식적으로 내재한 채 수행하는 실천의 양식이다.

이러한 관점은 다음과 같은 논리적 과정을 통해 구축된다.

첫째, 러스킨은 당위(‘ought’)를 제공한다. 건축은 진실하고 정직하며 노동의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5 이것이 1장의 '하이퍼-아우라'에 저항하는 비판적 건축가를 움직이는 윤리적 열망이다.

둘째, 타푸리는 현실(‘is’)을 제공한다. 건축은 노동과 재료를 도구화하는 자본의 시스템에 구조적으로 통합되어 있으며 8, 순수한 '진실성'을 추구하는 것조차 순진한 이데올로기적 목표가 될 수 있다.69 이것이 정치적 진단이다.

셋째, 21세기에 순수하게 러스킨적인 접근은 향수 어리고, 미학화되었으며, 정치적으로 맹목적인 도덕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74

넷째, 순수하게 타푸리적인 접근은 냉소적 마비 상태, 즉 "진보적인 건축적 실천의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 비관주의" 26 또는 '건축의 죽음' 6이라는 오해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76

다섯째, 따라서 동시대적 윤리란, 타푸리가 묘사한 구조적 제약들 7을 완전히 의식하면서, 러스킨이 묘사한 '진실성' 5을 향해 움직이는 방식으로, 이 특정한 프로젝트에서, 이 특정한 재료와 노동 조건 하에서 어떻게 행위할 것인가를 묻는 행위 그 자체다.

이는 '정직성'의 개념을 재정의한다. 정직성은 더 이상 순수한 상태(a state)가 아니라 비판적 과정(a process)이 된다. 즉, 타협에 대한 정직한 인정, 생산수단과의 투명한 관계 맺기, 그리고 이러한 현실을 이데올로기적 형태로 가리기를 거부하는 태도다. 이것이 바로 비판 이론에 근거한 '자기 이야기(self-story)'의 시작이다.

이러한 윤리적 실천은 건축가 개인의 고독한 결단을 넘어, 더 넓은 공동체 및 정치 구조와의 연계를 통해 확장될 것을 요구한다.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가 말한 '공론장(public sphere)' 77의 개념은 이러한 윤리적 투쟁의 장을 제공한다. 건축가의 실천은 폐쇄적인 전문가주의가 아니라, 사회의 다른 주체들과의 '의사소통 행위(communicative action)' 80가 되어야 한다.

나아가, 장뤽 낭시(Jean-Luc Nancy)의 '무위의 공동체(La communauté désoeuvrée)' 83 개념은 건축가 공동체가 흔히 빠지기 쉬운 '선한 집단'이라는 신화를 해체하는 데 기여한다. 낭시는 공동체란 공동의 목적이나 '작업(work/œuvre)'을 통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84, 오히려 그러한 신화가 해체된 자리에서 '함께-있음(being-with)' 88을 노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동시대 건축가의 윤리는 '완벽한 공동체'를 만들어내는(Work) 것이 아니라, 러스킨-타푸리의 모순 속에서 '함께-있음'을 고통스럽게 사유하는 과정(inoperative) 그 자체에 있다.

 

윤리적 쟁점 존 러스킨의 명령 만프레도 타푸리의 비판 본 논문의 동시대적 윤리
건축의 문제 도덕적 기만 (Deceit) 구조적 이데올로기 (Ideology) 의식의 부재 (Lack of Consciousness)
'진실'의 정의 재료와 노동의 정직성 자본주의 현실의 폭로 모순의 자기-고백 (Self-story)
건축가의 역할 정직한 장인 (Moral Maker) 비판적 지식인 (Critical Intellectual) 의식 있는 주체 (Conscious Subject)
실천의 방향 '좋은' 건물을 짓기 이데올로기 탈신비화 '공론장'에서의 의사소통 행위
함정 정치적 순진함 (Naïveté) 실천적 마비 / 냉소주의 (Paralysis) (필연적) 타협 속의 자기합리화
       

제3장: 문턱에서의 사유: 현실과 가상 사이의 건축

 

이 장은 1장과 2장에서 다룬 '이미지-자본'과 '윤리'의 문제가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공간적 조건 속에서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탐구한다. 가상과 현실의 분리는 급진적인 단절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 상태를 매개하는 건축의 근본적인 역할을 더욱 심화시키는 현상임을 주장한다.

 

1. 용해되는 경계: 물리적 문턱에서 디지털 인터페이스로

 

동시대 공간 경험의 본질은 물리적 공간과 가상 공간(Virtual Reality, Augmented Reality, Mixed Reality) 사이의 경계가 급격히 용해되는 현상에 있다.90 팬데믹은 이러한 경향을 가속화시켰으며, '가상의 차원(virtual dimension of being)' 94은 더 이상 건축의 외부가 아닌 핵심적인 조건이 되었다. 건축은 이제 단순히 물리적 건물을 구축하는 행위를 넘어, '디지털 환경'과 그 '사이 공간(in-between)' 95을 다루는 복합적인 실천으로 확장되고 있다.

 

2. 사이(in-between)의 언어: 경계의 재이론화

 

건축의 근본적인 역할은 공간을 '구획'하는 동시에 '연결'하는 것, 즉 '경계(boundary)'를 다루는 것이었다. 벽, 창, 문, 그리고 문턱(threshold)과 같은 건축의 고전적 요소들은 항상 안과 밖, 공과 사, 빛과 어둠, 성(聖)과 속(俗)을 매개하며 건축적 의미를 생산하는 주된 장소였다.98

디지털 시대의 '인터페이스(interface)' 99는 이러한 건축적 경계의 역할을 계승하는 새로운 시대의 '문턱'이다.98 스크린, VR 헤드셋, 햅틱 컨트롤러는 현실과 가상을 매개하는 새로운 문이자 창이다. 건축가는 이제 '디지털 세계'를 시각화하는 동시에 '물리적 세계'에 구축하는 "두 세계에 걸쳐 있는" 100 존재가 되었다. 건축이란 물리적 건물을 넘어 독자적인 생명력을 갖는 “조직화된 정보”라는 통찰은 이러한 문턱의 재이론화를 뒷받침한다.

 

3. 사례 연구: 하이브리드 리얼리티를 위한 디자인

 

이러한 하이브리드적 조건에 명시적으로 관여하는 건축적 실천으로, 본 절은 AAPK와 같은 콜렉티브의 작업을 분석한다. 이들은 『가상-건축(Architecture as Fabulated Reality)』 102에서 건축을 "꾸며낸(fabulated) 아이디어"의 집합으로 재정의한다.

이들의 핵심 주장은 '가상(virtual)'이 '가짜(fake)'가 아니라 '실재(real)의 또 다른 버전' 102이라는 것이다. 이는 VR 기술을 단순히 미래에 지어질 물리적 건물을 미리 보는 '도구(tool)' 103로 간주했던 기존의 관점을 넘어선다. AAPK에게 VR은 그 자체로 고유한 논리를 지닌 "자율적인 미학적-공간적 영역" 102이다. 예를 들어, 여러 장소의 현재를 가상 공간에 혼재시키거나 현실의 촉각과 가상의 시각을 의도적으로 불일치시키는 이들의 실험은, 건축의 역할이 물리적 '구축'에서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세계관의 설계'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4. 문턱 위의 신체: 현상학적 회귀

 

본 절은 순수하게 탈신체화된 디지털 공간 이해에 대한 비판적 대안을 제시한다. 가상 공간의 확산은 물리적 신체를 쓸모없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디지털과 상호작용하는 물리적 지점, 즉 문턱에 위치한 신체의 현상학적 경험을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게 만든다.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따른다.

첫째, 가상현실의 약속은 완전한 몰입, 즉 물리적 신체로부터의 '탈출(disembodiment)'처럼 보인다.

둘째, 그러나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현상학이 강조하듯, 모든 공간 경험은 '기하학적' 공간이 아니라 '체화된(embodied)' 신체를 통해 지각된다.106

셋째, VR 경험 역시 '탈신체화'가 아니라 '급진적 신체 변형' 109 또는 새로운 방식의 '체화된 자기-의식' 110이다. 우리는 가상 공간의 아바타를 '나의 몸'으로 느끼며110, '물리적 신체'는 가상과 현실을 연결하는 '커넥터' 역할을 한다.107

넷째, 이 모든 경험은 VR 헤드셋의 무게, 컨트롤러의 촉감, 방의 온도, 현실 세계에서 새어 들어오는 소리 등 구체적인 '물리적 인터페이스' 100에 의해 매개된다. 신체는 결코 뒤에 남겨지지 않으며, 단지 새로운 경계에 재배치될 뿐이다.

다섯째, 따라서 비판적 건축의 과제는 단지 가상 세계 그 자체를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턱 자체를 디자인하는 것이다. 이는 가상으로 '전이'되는 과정의 인체공학, 감각적 맥락, 사회적 의례 등을 고려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1장 3절에서 분석한 '하우스 도산'의 '전이공간' 40과 맞닿아 있다. 하우스 도산이 폐허 같은 1층(문턱)을 통해 방문객의 신체를 '브랜드 세계'(가상)로 인도했듯이, 3장의 건축가는 VR 헤드셋과 그 주변 환경(문턱)을 통해 사용자의 신체를 '디지털 세계'(가상)로 인도한다. 건축의 역할은 물리적 구축에서 '현실-가상'의 '경험적 전이'를 설계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제4장: 비평가의 과업: 탈신비화의 도구로서 역사와 이론

 

이 마지막 장은 건축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성찰한다. 만프레도 타푸리를 따라, 역사와 이론의 주된 과업은 실천을 위한 양식적 모델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는 비판적 도구로 기능함으로써 건축가가 ‘의식 있는 선택’을 하도록 힘을 실어주는 데 있음을 주장한다.

 

1. ‘조작적 비평’의 빈곤: 타푸리의 도전

 

본 절은 만프레도 타푸리의 ‘조작적 비평(operative criticism)’ 또는 ‘조작적 역사(operative history)’ 6에 대한 비판을 상세히 설명한다. '조작적 비평'이란 건축가와 비평가들이 자신의 동시대적 디자인 의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의 역사를 '도구적(instrumental)'으로 사용하는 행위를 의미한다.8 그것은 "과거의 역사를 미래를 향해 투사함으로써 기획한다".6

타푸리의 비판 대상은 당대의 저명한 건축사가들이었다.

  • 브루노 제비 (Bruno Zevi): 타푸리는 제비가 역사를 '참여적 비평(militant criticism)'의 도구로 사용한다고 비판했다.6 예를 들어, 1964년 제비가 기획한 '미켈란젤로 건축가' 전시는 미켈란젤로를 현대 '유기적 건축'의 선구자로 '조작'함으로써 117, 자신의 동시대적 건축 의제를 정당화하려 했다는 것이다.118
  • 알도 로시 (Aldo Rossi): 타푸리는 로시가 『도시의 건축』에서 '유형학(typology)' 119을 통해 역사를 초월하는 '도시의 상수(constants)' 119를 찾으려 한 시도 또한 비판했다. 타푸리에게 이는 자본주의라는 특수한 역사적 조건을 외면하고 건축을 초월적, 자율적 영역으로 도피시키려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적 시도에 불과했다.7

타푸리에게 이러한 '조작적 비평'은 역사를 왜곡할 뿐만 아니라, 건축이 처한 진짜 정치경제학적 모순을 은폐하고 건축가에게 '형태를 통해 사회를 구원할 수 있다'는 거짓된 희망을 심어주는 기만적인 행위다.6

 

2. ‘탈신비화’로서의 비판적 역사

 

'조작적 비평'의 대안으로 타푸리가 제시한 것은 ‘비판적 역사(critical history)’다.73

'비판적 역사'의 목적은 실천가에게 해결책이나 디자인 모델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그 목적은 정반대로, 건축을 형성하는 숨겨진 이데올로기, 권력 구조, 경제적 힘을 폭로하고 **‘탈신비화(demystification)’**하는 것이다.7

이를 위해 타푸리는 역사가의 과업과 설계자의 과업이 ‘완전하게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68 비평가/역사가는 건축이 어떻게 자본주의 생산 관계의 '외부'에 서서 그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으며 7 자본의 '이데올로그' 67로서 기능해왔는지를 냉정하게 분석해야 한다.7 이러한 타푸리의 방법론은 역사를 진보의 서사로 보는 것이 아니라, '파편'과 '흔적' 속에서 억압된 것을 드러내는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 73 및 미셸 푸코의 '고고학' 113과 깊이 연결된다.

 

3. 비평의 한계와 건물의 ‘침묵’

 

그러나 타푸리의 이러한 엄격한 입장은 그 자신을 심오한 딜레마로 이끈다. 만약 건축의 모든 유토피아적 시도가 이데올로기이며 71, 비평가의 유일한 역할이 이 무력함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그 다음은 무엇인가? 이로 인해 타푸리는 종종 '건축적 비관주의' 26 또는 '건축의 죽음' 6을 선언했다는 비판과 오해에 직면했다.

타푸리의 비판이 이데올로기의 베일을 모두 걷어냈을 때, 그 자리에 남는 것은 더 이상 어떤 유토피아적 언어로도 환원될 수 없는 건물 자체의 물질적인 ‘침묵’이다.123 모든 이론은 궁극적으로 이 "빛과 물질로 된 침묵" 앞에서 겸허해져야 하며, 이는 순수하게 텍스트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인 비판이 가진 한계를 암시한다.

 

4. 탈신비화에서 ‘자기 이야기’로: 행동을 위한 경로

 

본 절은 타푸리의 엄격함과 실천가를 위한 전진 경로를 종합하여 논문의 마지막 핵심 주장을 제시한다. 타푸리가 주장한 '탈신비화' 73와 '역사와 실천의 분리' 73는 마비 상태라는 최종 판결이 아니라, '의식 있는 주체' 7가 되기 위한 필수적인 방법론적 단계다. 그것은 '조작적 비평' 6이라는 그릇된 해결책들의 지반을 정리하는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이러한 결론은 다음과 같은 논리적 흐름을 통해 도출된다.

첫째, 건축가는 2장에서 본 러스킨적 충동, 즉 의미 있는 작업을 창조하려는 열망에서 시작한다.

둘째, 건축가는 교육과 미디어에서 '조작적 비평' 6, 즉 "건축은 사회에 봉사한다" 또는 "나의 디자인은 진보적이다"와 같은 손쉽지만 이데올로기적으로 의심스러운 정당화(거짓 이야기)를 학습한다.

셋째, 타푸리의 '비판적 역사' 73는 이러한 거짓된 정당화들을 해체할 도구를 제공한다. 그것은 건축가로 하여금 자신의 분과 학문이 자본 및 권력과 얼마나 깊이 얽혀 있는지 7 직시하게 만든다. 이것이 '탈신비화'의 순간이다.

넷째, 이는 위기로 이어진다. 만약 모든 낡은 이야기가 거짓이라면, 어떤 근거 위에서 행동할 수 있는가? 이것이 타푸리가 이끈다고 비난받는 '침묵' 123 또는 '마비' 76 상태다.

다섯째, 이 마비 상태에서 벗어날 길은, 이 비판적 이해의 파편들(벤야민, 러스킨, 타푸리 등)을 새로운 보편 이론(또 다른 '조작적' 유토피아)으로 종합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일관되며, 비판적인 입장으로 종합하는 것이다.

여섯째, 이것이 바로 비판적인 **‘자기 이야기(self-story)’**의 구축이다.9 '자기 이야기'는 주관성으로의 후퇴가 아니다. 그것은 타푸리의 '탈신비화'를 통과한 주체가, 2장의 '윤리적 아포리아'를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125, "이러한 모순 속에서 나는 왜,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를 스스로와 공론장을 향해 80 서술하는, 이론적으로 정보에 입각한 엄격한 윤리적 틀이자 '비판적 입장(Critical Positioning)' 126이다. 이것이 '비판적 실천' 128의 토대다.


결론: 비판적 실천을 향하여 - 의식 있는 주체로서의 건축가

 

본 논문은 동시대 건축이 '이미지-자본'의 논리 아래 진정성을 상실하고 '하이퍼-아우라'를 생산하는 기만적 현실에 처해 있음을 진단하는 것에서 출발했다(제1장). 이러한 진단에 대한 윤리적 응답으로, 존 러스킨의 도덕적 이상과 만프레도 타푸리의 정치경제학적 현실주의 사이의 해결 불가능한 '아포리아'를 동시대 건축가가 처한 윤리적 조건 그 자체로 제시했다(제2장). 또한 가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문턱'이 이 문제를 사유할 새로운 현장임을 밝혔다(제3장).

궁극적으로, 타푸리의 '조작적 비평' 비판(제4장)을 수용하는 것은 건축 실천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통한 순진한 유토피아적 실천의 종말을 의미한다. 비판적 실천의 목표는 더 이상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이미지, 혹은 건물을 포함한 건축의 모든 도구를 사용하여 세계와 더불어 '의식 있는(conscious)'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제4장에서 개진된 '자기 이야기(self-story)'에 근거한 '비판적 실천(critical practice)' 128은 특정한 스타일이 아니라 실천가의 의식(consciousness) 7에 의해 정의된다. 그것은 건축가가 자신의 작업이 속한 정치경제학적 맥락을 '탈신비화'하려는 73 의식적 태도다.

이러한 재정의는 건축 작업의 개념을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을 넘어 확장시킨다. 글쓰기, 연구, 교육, 행동주의, 큐레이팅 등은 건축 분야의 비판적 ‘탈신비화’와 타인들의 의식 함양에 기여하기에, 모두 정당하고 필수적인 건축적 실천의 형태로 인정된다.68

결론적으로, 이미지-자본 시대의 소실점을 향한 질주 속에서, 건축의 진정성은 유토피아적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순을 직시하고 자신의 입장을 구축하는 '주체'의 비판적 '이야기' 속에 있다. 건축은 최상의 상태에서 공간으로 구현된 철학의 한 형태이며, 비판적 실천의 목표는 세계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의식'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선별)



핵심 이론가와 개념 지도

 

이론가 핵심 개념 주요 관련 장(Chapter) 인접 사상가
발터 벤야민 아우라 (Aura), 제의가치/전시가치, 기술복제 제1장, 제4장 테오도어 아도르노,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존 러스킨 진실의 등불, 정직성, 노동, 기만 제2장 윌리엄 모리스, A.W.N. 퓨긴, 외젠 비올레르뒤크 (반론)
만프레도 타푸리 이데올로기 비판, 조작적 비평, 탈신비화 제2장, 제4장 마시모 카차리, 프란체스코 달 코, 루이 알튀세르, 안토니오 그람시
기 드보르 스펙터클, 분리, 소외, 도시 제1장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앙리 르페브르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크르, 시뮬라시옹, 하이퍼리얼리티 제1장, 제3장 마셜 매클루언, 폴 비릴리오
위르겐 하버마스 공론장, 의사소통 행위 제2장 (윤리적 담론의 틀) 한나 아렌트, 칼오토 아펠
장뤽 낭시 무위의 공동체, 함께-있음, 단독성 제2장 ('선한 집단' 비판) 조르조 아감벤, 모리스 블랑쇼, 조르주 바타유

 

주요 1차 문헌

 

  • 낭시, 장뤽. (1986). 무위의 공동체 (La communauté désoeuvrée). 85
  • 드보르, 기. (1967). 스펙터클의 사회 (La Société du spectacle). 16
  • 러스킨, 존. (1849). 건축의 일곱 등불 (The Seven Lamps of Architecture). 5
  • 러스킨, 존. (1851-1853). 베네치아의 돌 (The Stones of Venice). 47
  • 벤야민, 발터. (1935).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 1
  • 보드리야르, 장. (1981). 시뮬라시옹 (Simulacres et Simulation). 8
  • 타푸리, 만프레도. (1968). 건축의 이론과 역사 (Teorie e storia dell'architettura). 6
  • 타푸리, 만프레도. (1973). 건축과 유토피아: 디자인과 자본주의 발전 (Progetto e utopia: Architettura e sviluppo capitalistico). 8
  • 타푸리, 만프레도. (1980). 구와 미로: 피라네시부터 70년대까지의 아방가르드와 건축 (La Sfera e il labirinto: Avanguardie e architettura da Piranesi agli anni '70). 73
  • 하버마스, 위르겐. (1962). 공론장의 구조변동 (Strukturwandel der Öffentlichkeit). 78
  • 하버마스, 위르겐. (1981). 의사소통 행위 이론 (Theorie des kommunikativen Handelns). 80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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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 - MIT, 11월 11, 2025에 액세스, https://web.mit.edu/allanmc/www/benjamin.pdf
  3. Reproducing Walter Benjamin's 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 AR515 Becca Ment 8 December 1999 - Mountain Scholar, 11월 11, 2025에 액세스, https://mountainscholar.org/bitstreams/d6d145d5-e588-43f0-87ca-3ff88ad1965c/download
  4. John Ruskin's Seven Lamps of Architecture | Dynamic Design, 11월 11, 2025에 액세스, https://moniquerblog.wordpress.com/2014/12/19/john-ruskins-seven-lamps-of-architecture/
  5. The Seven Lamps of Architecture - Wikipedia, 11월 11, 2025에 액세스, https://en.wikipedia.org/wiki/The_Seven_Lamps_of_Architecture
  6. Intellectual Work and Capitalist Development: Origins and Context of Manfredo Tafuri's Critique of Architectural Ideology - The City as a Project, 11월 11, 2025에 액세스, http://thecityasaproject.org/2011/03/pier-vittorio-aureli-manfredo-tafuri/
  7. Contemporary architecture's situation was never more radically theorized than by Manfredo Tafuri. Locating architecture's in - Monoskop, 11월 11, 2025에 액세스, https://monoskop.org/images/7/79/Tafuri_Manfredo_1969_1998_Toward_a_Critique_of_Architectural_Ideology.pdf
  8. Notes on Tafuri, Militancy, and Unionization - The Avery Review, 11월 11, 2025에 액세스, https://averyreview.com/issues/56/notes-on-tafu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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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5. From Michelangelo to Borromini | 16 | Bruno Zevi and Operative Critici, 11월 11, 2025에 액세스, https://www.taylorfrancis.com/chapters/edit/10.4324/9781315613918-16/michelangelo-borromini-roberto-dulio-maarten-delbeke-andrew-le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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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6. History/Theory - Stephan Trüby - Positioning Architecture (Theory) - e-flux, 11월 11, 2025에 액세스, https://www.e-flux.com/architecture/history-theory/159235/positioning-architecture-theory
  127. Architecture, Critique, Ideology - SITE ZONES, 11월 11, 2025에 액세스, https://sitezones.squarespace.com/s/Architecture_Critique_Ideology_Writings.pdf
  128. What is “Critical” in Architectural Practice Today? - Common Edge, 11월 11, 2025에 액세스, https://commonedge.org/what-is-critical-in-architectural-practice-today/
  129. THE SOCIETY OF THE SPECTACLE - Libcom.org, 11월 11, 2025에 액세스, https://files.libcom.org/files/The%20Society%20of%20the%20Spectacle%20Annotated%20Edition.pdf
  130. The Stones of Venice - Lancaster University, 11월 11, 2025에 액세스, https://www.lancaster.ac.uk/media/lancaster-university/content-assets/documents/ruskin/9-11StonesofVenice.pdf
  131. The Sphere and the Labyrinth: Avant-Gardes and Architecture from Piranesi to the 1970s - Goodreads, 11월 11, 2025에 액세스, https://www.goodreads.com/book/show/1126810.The_Sphere_and_the_Labyrinth
  132. The Disappearance: Manfredo Tafuri's The Sphere and the Labyrinth (April 2013), 11월 11, 2025에 액세스, https://site-writing.co.uk/the-disappearance-manfredo-tafuris-the-sphere-and-the-labyrinth-april-2013/
  133. The Sphere and the Labyrinth | DOUBLE OPERATIVE, 11월 11, 2025에 액세스, https://doubleoperative.com/wp-content/uploads/2009/12/manfredo-tafuri-the-sphere-and-the-labyrinth-avant-garde-and-architecture-from-piranesi-to-the-1970s-1979.pdf

 

서론: 매개자의 퇴각

 

문화 생산의 생태계는 창작자와 소비자라는 이 두 개의 극점만으로 지탱되지 않는다. 사용자의 핵심 명제, 즉 "문화 매개자들이... 논란을 앞에 두고... 뒤로 물러나서는 안 된다.... 물리적, 상징적 이익을 얻는 입장이라면 더욱 그러하다"는 주장은 이 생태계의 숨겨진, 그러나 가장 강력한 행위자들의 책임을 정확히 조명한다. 문화 매개자(cultural mediators)—출판사, 비평가, 갤러리, 큐레이터, 영화제, 시상식 아카데미, 그리고 학술 기관—는 단순히 창작자와 소비자 사이를 연결하는 수동적인 '도관(conduit)'이 아니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이론적 틀 안에서, 이들은 '문화 생산의 장(field of cultural production)'1 내에서 능동적으로 가치를 생산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행위자(agent)이다. 부르디외에게 '장(field)'이란, 특정 자본(예: 경제적 자본 또는 문화적 자본)을 둘러싼 '권력의 힘과 투쟁(power forces and struggles)'이 벌어지는 관계적이고 역동적인 사회적 공간(social arena)이다.2 문화 매개자는 이 투쟁의 최전선에 서 있으며, 이들의 '선택', '배제', '정당화' 행위는 어떤 작품이 '예술'로 인정받고 어떤 작가가 '위대한 대가'로 호명되는지를 결정한다.

따라서 사용자가 지적한 '뒤로 물러섬(retreat)'은 중립적인 태어나 수동적인 무지가 아니다. 이는 논란이라는 '투쟁'의 결정적 국면에서, 자신들이 그간의 매개 행위를 통해 축적해 온 상징적 자본(symbolic capital, 즉 권위, 명성, '좋은 취향'의 소유자라는 평판)과 경제적 자본(economic capital, 즉 수익, 시장 점유율, 후원금)을 동시에 방어하기 위한 적극적인 '전략(strategy)'이다.4 부르디외의 용어를 빌자면, 이러한 전략적 후퇴는 매개자의 '아비투스(habitus)'5, 즉 그들 집단이 내면화한 구조화된 성향이, 주어진 '가능성의 공간(espace des possibles)'6 내에서 특정 '입장 표명(position taking)'4을 선택한 논리적 귀결이다.

본 보고서는 이 '퇴각'이라는 전략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매개자의 책임이 구조적으로 필연적임을 논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 1부는 매개자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품의 가치를 생산하고, 그 과정에서 사용자가 언급한 '물리적, 상징적 이익'을 획득하는지 부르디외의 이론을 통해 분석한다.
  • 2부는 매개자가 논란에 직면했을 때 '퇴각'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핵심적인 방어 논리—'예술 자율성', '저자의 죽음', '객관성', '검열 반대'—가 이론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얼마나 취약하고 모순적인지를 해부한다.
  • 3부는 영화, 문학, 철학 분야에서 발생한 구체적인 스캔들(로만 폴란스키, 페터 한트케, 우디 앨런, 마르틴 하이데거)을 심층 사례 연구로 삼아, 매개자들이 실제로 어떻게 이 방어 논리를 사용했으며 그 논리가 어떻게 붕괴했는지를 추적한다.
  • 4부는 지젤 사피로(Gisèle Sapiro)의 '저자-기능' 분석과 '선택 설계' 이론을 통해, 매개자의 '선택'이 중립적인 플랫폼 제공이 아니라 그 자체로 윤리적 함의를 지닌 '설계' 행위이며, 따라서 그 책임은 구조적으로 필연적임을 결론짓는다.

 

1부: 가치의 연금술: 매개 행위의 구조와 메커니즘

 

매개자는 단순히 완성된 작품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유통업자가 아니다. 그들은 가치 그 자체를 '창조'하는 연금술사이며, 이 과정은 명확한 사회학적 메커니즘을 따른다.

 

1.1. 문화 생산의 장(場)과 권력 투쟁

 

부르디외가 제시한 '문화 생산의 장'은 단순히 문화 상품을 '부유함 vs 가난함' 또는 '오래됨 vs 젊음'으로 분류하는 도표가 아니다.1 그것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행위자들(개인과 집단)의 "포함 또는 배제... 그들의 행동과 상호 관계"를 결정하는 권력 투쟁의 역동적인 장(場)이다.2 이 장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상반된 자본의 논리 사이의 갈등에 의해 구조화된다. 바로 '경제적 자본(economic capital)'과 '문화적 자본(cultural capital)'이다.7

사용자의 질의가 겨냥하는 현대의 매개자들, 즉 대형 출판사, 방송사, 저널리즘, 영화 아카데미와 같은 '대규모 문화 생산 단위(large units of cultural production)'8에 종사하는 이들은 이 갈등의 한복판에 서 있다. 부르디외는 이들을 '프롤레타로이드 인텔리겐치아(proletaroid intelligentsia)'8라고 명명하기도 했는데, 이들은 순수한 '미학적 입장(aesthetic position-takings)'과 '정치적 입장(political position-takings)' 또는 시장의 논리 사이의 모순을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된다.8

부르디외는 문화의 장을 두 개의 극점으로 설명한다. 하나는 '자율적(autonomous)' 극으로, 예술 고유의 논리('순수 예술')를 강조하며 경제적 가치를 경시한다. 다른 하나는 '타율적(heteronomous)' 극으로, 시장, 권력, 대중의 의견과 같은 '외부적 요인(external factors)'에 의존한다.3 대형 상업 미디어는 명백히 이 '타율적' 극에 속하며, 이들의 목표는 종종 순수하게 "경제적이고 청중에게 어필하는 것(purely on economics and appealing to the audience)"이다.3

사용자가 지적한 매개자의 '책임 회피'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그들의 '퇴각'은 개인적 결함이 아니라, 그들이 속한 '장'의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된 필연적 증상이다. 논란이 발생했을 때, 이들 매개자는 '미학적 가치'(자율적 극의 논리, 예: 로만 폴란스키의 뛰어난 연출력)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경제적/정치적 입장'(타율적 극의 논리, 예: 기존의 권력 구조 옹호, 아카데미의 명성 유지)을 방어하기 위한 전략을 구사한다. 이 모순 자체가 그들이 이익을 얻는 방식의 핵심이다.

 

1.2. 정전화(Canonization) 엔진: 가치 부여의 권력

 

매개자의 가장 강력한 힘은 '정전화(canonization)', 즉 특정 작품이나 작가를 '고전' 또는 '대가'의 반열에 올려놓는 행위에서 나온다. 이 과정은 종종 작품의 '내재적 속성(intrinsic properties)'9과는 무관하게 작동할 수 있으며, 전적으로 매개자의 '축성(consecration)' 권력에 의존한다.

이 과정에서 비평(criticism)은 "결정적인 역할(determining role)"8을 수행한다. 비평가와 학자들은 작품에 '객관적으로 새겨진 의미(meaning objectively inscribed in a work)'8를 '해명'함으로써, 사실상 그 의미를 부여한다. 그들은 작가가 자신의 특이성을 실현하도록 돕는 것처럼 보이지만8, 실제로는 자신들의 권위를 통해 그 가치를 보증한다.

이러한 '가치' 부여 투쟁10은 결코 순수하지 않으며, 강력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동기(politically and ideologically motivated)'11에 의해 추동된다. 예를 들어, 20세기 중반 표현주의(Expressionism)가 급격히 정전화된 사례는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나치 정권에 의해 '퇴폐 미술(degenerate art)'11로 낙인찍혔던 표현주의는, 전후 나치즘의 대척점에 있는 예술, 즉 '민주주의, 자유, 개인주의'를 상징하는 '상징적 가치(symbolic value)'11를 부여받았다.

이 과정에서 미술관장(museum directors)과 같은 매개자들은 '축성의 권력(power of consecration)'11을 행사하며, 심지어 대중이 전통적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ideas of beauty)'11과 일치하지 않는 미학조차도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의 작품이 3억 달러(2015년 기준)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에 거래되는 현상9은, 칸트가 말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부르디외가 지적했듯이 엘리트 매개자들이 소위 '고급' 예술에 엄청난 '상징적 가치'를 부여한 결과물이다.9

 

1.3. '뒤집힌 경제의 세계': 상징적 이윤과 물리적 이윤

 

문화 생산의 장은 '뒤집힌 경제의 세계(an economic world turned upside down)'7라는 역설적인 논리로 작동한다. 이 세계에서는 경제적 자본(돈)을 노골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금기시되며12, 대신 상징적 자본(명성, 권위, 인정)의 획득이 지상 과제로 간주된다. 예술과 돈에 대한 논의는 "수치스럽거나 금기시"된다.12

그러나 이 상징적 자본은 그 어떤 자본보다도 효과적으로 '물리적 이익', 즉 경제적 자본으로 전환된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문화적 자본(예: 예술에 대한 식견, 학력)은 그 자체로 '상징적 자본'으로 기능하며, 이것이 자본임은 '인정되지 않고(unrecognized as capital)' 대신 '정당한 역량(legitimate competence)'이나 '권위(authority)'로 (오)인식된다.13 바로 이 (오)인식을 통해, 문화적 자본의 소유자는 "물질적, 상징적 이익(material and symbolic profits)"13을 동시에 확보한다.

매개자들은 이 '전환' 과정의 중심에 서서 이중의 이익을 취한다.

  • 큐레이터와 갤러리: 이들은 자신들을 '경제적으로 무관심한(economically disinterested)' 예술 전문가로 위치시킨다.14 바로 이 '무관심'이라는 태도를 통해서만, 그들은 현대 미술의 '불확실한 가치를 안정화'시키고 '명성을 부여할 권위(authority to confer prestige)'14를 얻는다. 이 권위는 다시 갤러리와 큐레이터에게 '경제적 역학(economic dynamics)'15을 재편할 힘을 주어, 작품 판매와 전시를 통해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게 한다. 그들의 상징적 이익(권위)이 물리적 이익(수수료)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 출판사와 시상식: 18세기에 후원자가 사라지고 출판사가 그 자리를 대신하면서8, 출판사나 극장 제작자 같은 매개자들은 '경제적, 사회적 제약'에 종속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선택 행위(selective operations)' 자체가 '문화적 정당성(cultural legitimacy)'8을 부여받는 기관이 되었다. 세자르 상(César Awards)은 미국의 오스카상(Oscars)과 마찬가지로16, 수상자에게 조각가 세자르(César)가 디자인한 트로피17라는 '상징적 가치'와 더불어, 박스오피스에서의 성공18이라는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동시에 안겨준다.

다음 표는 주요 문화 매개자들이 자신들의 매개 행위를 통해 어떻게 사용자가 지적한 '물리적(경제적) 이익'과 '상징적 이익'을 동시에 축적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표 1: 문화 매개자의 유형과 자본 축적 방식

 

매개자 유형 핵심 매개 행위 주된 경제적 이익 (물리적 이익) 주된 상징적 이익 (상징적 이익)
출판사 (Publishers) 출간 결정, 편집, 마케팅 도서 판매 수익, 저작권료19 업계 평판, '베스트셀러 작가' 발굴 명성, 문화적 의제 설정8
시상식 (Awards Academies) 후보 선정, 수상 (정전화) 후원금, 방송 중계권료, (회원들의) 박스오피스 상승18 '최고의 예술'을 정의하는 권위16, 국가적 명예, 문화적 정당성
비평가 (Critics) 리뷰, 평론 (가치 판정) 원고료, 급여, 도서 추천사 '좋은 취향'의 소유자라는 명성13, 문화적 담론 주도권8
큐레이터/갤러리 (Curators/Galleries) 전시 기획 (선택과 배제) 작품 판매 수수료, 입장료 수익20 '경제적으로 무관심한' 전문가라는 권위14, 예술사조 정의15
학계 (Academia) 연구, 강의, 학술 출판 급여, 연구비, 출판 인세 '정당한 역량'의 소유자13, 지적 권위, '유산'의 공식 해석자

 

2부: 무너지는 방어 논리: 중립과 자율성의 신화

 

1부에서 확인했듯이, 문화 매개자는 가치 생산의 핵심 행위자로서 막대한 상징적, 경제적 이익을 취한다. 그러나 논란이 발생했을 때, 이들은 자신들이 구축한 이익과 권위를 방어하기 위해 '퇴각'하며, 이 퇴각을 정당화하기 위해 여러 이론적 알리바이를 동원한다. 2부는 이 방어 논리들이 왜 허구에 가까운지를 분석한다.

 

2.1. '저자의 죽음'이라는 알리바이

 

매개자의 방어: "우리는 작가의 사생활이나 도덕성이 아니라 작품의 미학적 가치만을 다룬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선언했듯이 '저자는 죽었다'."

이론적 근거: 롤랑 바르트의 1967년 에세이 '저자의 죽음(Death of the Author)'은 텍스트의 의미를 저자의 의도나 개인적 이력21에 가두는 전통적 비평에 반기를 들었다. 바르트는 텍스트가 "다차원적 공간"22이며, 그 의미는 '저자-신(Author-God)'22이 부여하는 단일한 '신학적 의미'가 아니라 독자의 해석을 통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21

논리적 반박: 이 방어 논리는 바르트의 이론을 그 본래의 비판적 맥락에서 탈취하여 정반대의 목적으로 오용하는 지적 기만이다.

  1. 바르트가 '저자'의 죽음을 선언했을 때, 그는 '저자'라는 개념 자체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capitalist ideology)'23와 분리될 수 없는 역사적 구성물임을 지적했다. '저자의 이름(author's name)'은 작품을 하나의 '독점적 이름(proprietary name)'23 아래 고착시키고, 이를 '지적 재산권(intellectual property)'23이라는 소유물로 만드는 장치라고 비판했다.
  2. 따라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 주체인 출판사가 '지적 재산권'에 기반해 '저자의 이름'(예: 우디 앨런, 마일로 야노풀로스)이 인쇄된 책을 팔아 막대한 이윤을 추구하면서19, 동시에 그 저자의 도덕적 행위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자 '저자는 죽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심각한 자기모순이다.
  3. 그들이 '저자의 죽음'을 호출할 때, 그들은 텍스트의 해방22이나 독자의 권력21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저자'의 이름값(브랜드 가치)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이익'25은 극대화하면서, '저자'의 행위에서 발생하는 '도덕적 책임'은 회피하려 한다. 이는 '저자의 죽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저자'라는 상품의 '지적 재산권'23을 보호하기 위한 가장 자본주의적인 '저자의 생존' 전략에 불과하다. 그들은 저자(person)가 죽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책임'만 죽기를 바랄 뿐이다.

 

2.2. 플로베르의 오독: '객관성'은 전략이지 중립이 아니다

 

매개자의 방어: "위대한 예술은 도덕적 판단을 유보한다. 창작자는 중립적이어야 한다. 귀스타브 플로베(Flaubert)가 말했듯이, 작가는 '우주 속의 신처럼,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아야 한다(present everywhere and visible nowhere)'.26"

이론적 근거: 플로베르는 《마담 보바리(Madame Bovary)》를 집필하며, 발자크(Balzac)와 같은 이전 세대 작가들의 '설교하는' 서술 방식27을 거부했다. 그는 저자의 목소리를 숨기고 '미학적 거리(aesthetic distance)'28를 확보했으며, 독자가 스스로 '객관적 판단(objective judgment)'28을 내리도록 유도하는 '객관적 서사'를 추구했다.

논리적 반박: 이 '객관성'은 결코 '중립'이 아니었으며, 이를 '중립'의 근거로 인용하는 것은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처사이다.

  1. 1857년 《마담 보바리》가 '공중도덕 및 종교에 대한 모욕'29으로 기소된 재판은, 플로베르의 이러한 '객관적' 서사 방식 자체가 당대 권력에게는 '이데올로기적 범죄(ideologically criminal)'29로 받아들여졌음을 증명한다.
  2. 검찰이 문제 삼은 것은 플로베르가 보바리 부인의 간통을 비난하지 않았다는 점, 즉 '중립성' 그 자체였다. 플로베르의 '저자-서술자 분리' 전략은 가족, 종교 등 국가가 공인한 규범의 '유효성(validity)'과 '판단의 주체(subject of narration and judgment)'29 자체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는, 당대에는 매우 급진적이고 도전적인 정치적 행위였다.
  3. 따라서 오늘날 문화 매개자가 '플로베르적 객관성'을 내세워 논란이 되는 작품(예: 페터 한트케의 학살 옹호)을 방어하는 것은, 플로베르의 전략을 정반대로 오용하는 것이다. 플로베르가 '기성 권력에 도전하기 위해' 사용했던 '객관성'이라는 칼을, 이들 매개자는 '비판받는 권력(학살 부인론자)을 방어하기 위해' 사용한다. 이는 플로베르의 정신에 대한 배반이다.

 

2.3. '순수 예술'이라는 허상: 예술 자율성의 역사성

 

매개자의 방어: "예술의 가치와 도덕적 가치는 자율적(autonomous)이다. 예술 작품의 도덕적 결함이 그 작품의 미학적 가치를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이론적 근거: 이 주장은 '온건한 자율주의(moderate autonomism)'30라 불리는 미학 이론에 기반한다. 이 입장은 예술이 그 자체의 고유한 '미학적 태도(artistic attitude)'31를 요구하며, 도덕적 가치와 미학적 가치는 서로 독립적인 영역이라고 주장한다.30 이는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32의 오랜 전통에 기대고 있다.

논리적 반박: 부르디외와 지젤 사피로의 사회학적 분석은 이러한 '자율성' 개념 자체가 특정 시기에 특정 목적을 위해 '구성된' 이데올로기적 신화임을 폭로한다.

  1. 역사적 구성물: '순수' 예술(자율적 극)과 '상업' 예술(타율적 극)의 이중 구조는 19세기 중반(1830-1880)에 '구성(settled down)'된 것이다.12 예술이 '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게 된 것12은, 예술가들이 귀족이나 교회의 후원8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장'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채택한 이데올로기적 전략이었다.
  2. 정치적 은폐: '예술 자율성' 논리가 가장 위험하게 사용된 사례는 지젤 사피로(Gisèle Sapiro)의 연구에서 드러난다. 사피로는 나치 점령기 프랑스에서, 권위 있는 문예지 '누벨 뢰뷔 프랑세즈(Nouvelle Revue française)'가 독일 대사 오토 아베츠(Otto Abetz)의 정치적 통제 하에 재출간되었을 때, 이들이 내세운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자율성 논리가 실제로는 "이 문예지의 정치적 통제를 가리기 위한(to mask the political control)"33 수단이었음을 밝혔다.
  3. 결론: '예술 자율성'은 진공 상태에 존재하는 순수 원칙이 아니라, 특정 역사적 시기에 특정 목적(때로는 저항, 때로는 공모)을 위해 사용된 '전략'이다. 따라서 오늘날 노벨상 위원회와 같은 매개자가 이 '자율성'을 내세워 페터 한트케를 방어할 때34, 그들은 19세기 아방가르드의 저항적 몸짓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나치 부역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은폐'33를 위해 사용했던 위험한 논리를 반복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2.4. '비판'과 '검열'의 의도적 혼동

 

매개자의 방어: "우리의 편집권/시상 결정을 비판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검열(censorship)'이며, '캔슬 컬처'라는 야만적 행위이다."

이론적 근거: 국가 권력에 의한 검열은 예술의 실험적 성격을 억압하고, 전통적 가치를 보존하려는 보수적 목적을 가지며, "문화 공간을 질식(asphyxiation of the cultural space)"시킬 수 있다.35

논리적 반박: 이 방어 논리는 '검열', '비판', '편집권'이라는 세 가지 다른 개념을 의도적으로 혼동하여, 자신들을 피해자로 둔갑시키는 수사적 전략이다.

  1. 검열 vs. 편집권: '검열'은 주로 국가 권력이 이미 존재하는 표현물을 사후에 금지하거나 강제로 수정하는 행위이다. 반면, 아셰트(Hachette)와 같은 민간 출판사가 우디 앨런의 회고록 출간을 거부하기로 결정하는 것36은 '검열'이 아니라, 그들의 본질적인 사업 기능인 '편집권(editorial judgment)' 또는 '큐레이션(curation)'이다. 한 젊은 출판사 직원의 지적은 핵심을 찌른다. "표현의 자유가 출판 계약을 맺을 권리(the right to a book contract)와 너무 자주 동일시되고 있다".37
  2. 검열 vs. 비판: 매개자의 결정(예: 폴란스키 수상)에 항의하고38, 보이콧을 요구하며39, 내부 고발을 하는 행위40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더 많은 발언(more speech)"41을 통해 유해한 발언(예: 학살 부인)에 "반박하고(refute)" 그 해악을 "무효화(undo)"41하려는 또 다른 민주적 표현 행위이다.
  3. 전략적 혼동: 매개자가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검열'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토론의 프레임을 '예술이냐 외설이냐' 또는 '표현의 자유냐 억압이냐'42로 바꾸어, 자신들의 '선택'에 내재된 윤리적 책임을 회피하고 토론 자체를 무력화하려는 수사적 전략88에 불과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비판받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검열'로 낙인찍는다.

 

3부: 스캔들의 해부: 논란에 직면한 매개자들

 

2부에서 논파된 방어 논리들은 실제 스캔들 현장에서 매개자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 논리들은 비판자들의 저항과 매개자 내부의 균열로 인해 붕괴하고 있다. 3부에서는 아카데미, 출판, 학계라는 세 가지 영역에서 발생한 주요 사례를 통해 매개자들이 논란에 어떻게 직면하고, 어떻게 '퇴각'하며, 그 퇴각이 어떻게 실패하는지를 분석한다.

다음 표는 3부에서 다룰 핵심 사례들을 2부의 분석틀(방어 논리)과 연결하여 요약한 것이다.

표 2: 논란에 대한 매개자 대응 분석 (주요 사례)

 

사례 (행위자) 논란의 핵심 매개자의 초기 방어 논리 비판 주체 (및 방식) 최종 결과 (및 시사점)
페터 한트케 (노벨상 위원회) 스레브레니차 학살 부인 및 밀로셰비치 옹호43 "미학적 자율성", "작품과 작가 분리"34 학살 피해자 단체, 작가들55, 내부 위원54 수상 강행. (매개자의 권위가 '학살 부정'에 상징적 정당성 부여)
로만 폴란스키 (세자르 아카데미) 아동 성범죄 유죄 판결 및 도피46 "아카데미는 도덕적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39 아델 하에넬59, 페미니스트 단체38, 이사회39 수상 강행, 아카데미 붕괴. (매개자의 '중립'이 '공모'임이 폭로됨)
우디 앨런 (아셰트 출판그룹) 양녀 성추행 의혹24 "편집권 독립", "시장 수요"24 내부 직원40, 로넌 패로우48 출간 취소.36 (매개자 내부의 윤리적 반란이 이윤 논리를 이김)
마르틴 하이데거 (클로스터만/철학계) '검은 노트'의 형이상학적 반유대주의49 "철학적 핵심과는 무관", "유산의 일부로 맥락화"51 동료 철학자들52, 학회장74 논쟁 지속. (매개자(학계)가 '정전'을 방어하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

 

3.1. 사례 1: 아카데미의 '권위'와 '수치' (The Academy's 'Authority' and 'Shame')

 

시상식 아카데미는 '정전화(canonization)' 권력의 정점에 있는 매개자이다. 이들이 수여하는 상은 막대한 상징적, 경제적 이익을 창출한다.18 따라서 이들의 '선택'은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3.1.1. 페터 한트케 (노벨 문학상, 2019)

 

스웨덴 한림원(Swedish Academy)이 201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페터 한트케(Peter Handke)를 선정했을 때, 그들은 오랜 역사적 논쟁의 중심에 섰다. 한트케는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 세르비아의 만행을 부인하고45, 1995년 스레브레니차 집단 학살의 사실관계를 의심하며43, 전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šević)의 장례식에 참석해 연설한 인물이다.45

논란에 직면한 한림원(매개자)의 방어 논리는 2부에서 분석한 '예술 자율성'의 전형이었다. 한림원 회원들은 한트케가 "정치적 문제에 대해 도발적이고 부적절하며 불분명한 발언"을 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저작에서 시민 사회에 대한 공격이나 모든 사람의 동등한 가치에 대한 존중을 저버리는 내용을 찾지 못했다"고 주장했다.45 그들은 노벨상이 "전쟁 범죄나 학살 부인을 보상하려 한 의도는 분명히 없다"45고 해명했다. 이는 '작품'과 '작가'를 분리하는 '극단적 자율적 미학적 입장(extreme autonomous aesthetic stance)'34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이 '분리'가 불가능하며 유해하다고 반박했다. 살만 루슈디(Salman Rushdie)를 비롯한 작가들은 한트케가 "엄청난 통찰력과 충격적인 윤리적 맹목성(shocking ethical blindness)"55을 결합했다고 비판했다. 학살 피해자 단체와 시위대에게 이 수상은 "학살 부인의 국제화 및 정상화(internationalization and normalization of genocide denial)"43를 의미했으며, 한림원의 권위가 학살 부정론에 상징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행위였다.56 이 스캔들은 한림원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균열을 일으켰다. 노벨위원회의 외부 위원 2명은 한트케 선정을 비판하며 사임했는데, 그중 한 명은 "2019년 수상자 선정은... 문학이 '정치' 위에 있다는 입장을 옹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으며, 이는 나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다"라고 밝혔다.54

 

3.1.2. 로만 폴란스키 (세자르 상, 2020)

 

프랑스의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세자르(César) 아카데미가 2020년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에게 감독상을 수여한 사건은, 매개자의 '중립' 주장이 어떻게 '공모'로 폭로되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폴란스키는 1977년 13세 아동 성범죄(statutory rape) 혐의에 유죄를 인정한 뒤 미국에서 도피했으며, 이후에도 다수의 성폭력 의혹에 휩싸였다.46

논란에도 불구하고 폴란스키의 영화 <장교와 스파이(J'accuse)>가 12개 부문 후보에 오르자, 아카데미 원장 알랭 테르지앙(Alain Terzian)은 "아카데미는 상을 주는 데 있어 도덕적 입장을 취해서는 안 된다(should not take moral positions)"39고 주장하며 매개자의 '퇴각'을 공식화했다.

이에 대한 반격은 즉각적이고 전면적이었다. 시상식 당일, 배우 아델 하에넬(Adèle Haenel)은 폴란스키가 감독상 수상자로 호명되자 시상식장을 떠나며 "수치심!(La honte!)"47이라고 외쳤다. 이 외침은 "브라보, 소아성애!(Bravo, paedophilia!)"61라는 절규로 이어졌다. 하에넬은 이미 시상식 전 "그를 수상자로 구별하는 것은 모든 희생자들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distinguishing Polanski” would be like “spitting in the face of all victims)"58이며, "이는 여성을 강간하는 것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58고 비판했다.

작가 비르지니 데팽트(Virginie Despentes)는 <이제 우리는 일어선다(Now We Get Up)>라는 제목의 격문에서 이 사건을 더욱 심층적으로 분석했다. 그녀는 이것이 프랑스 영화계 '보스들(bosses)'이 수십 년간 유지해 온 '오메르타(omertà, 침묵의 카르텔)'64이며, 매개자들이 폴란스키를 방어하는 것은 "자신들의 범죄성 속에서도 우리의 존경을 요구하는(demanding our admiration even in your criminality)"64 행위라고 규탄했다. '중립'을 가장한 매개자의 '퇴각'이 사실은 피해자들에 대한 '상징적 폭력'38이자 기존 권력 구조와의 '공모'임이 폭로된 것이다. 이 사태의 여파로, 시상식 직전 아카데미 이사회 전원이 총사퇴39하며 아카데미는 사실상 붕괴했다.

 

3.2. 사례 2: 출판사의 '이윤'과 '윤리' (The Publisher's 'Profit' and 'Ethics')

 

출판사는 '시장 논리'라는 타율적 극3과 '문화적 가치'라는 자율적 극 사이에서 가장 첨예한 모순을 겪는 매개자이다. '이윤'은 출판사의 존속을 위한 최우선 과제이다.19

 

3.2.1. 우디 앨런 (아셰트 출판그룹, 2020)

 

아셰트(Hachette) 출판그룹은 양녀 딜런 패로우(Dylan Farrow)에 대한 성추행 의혹을 지속적으로 받아온 우디 앨런(Woody Allen)의 회고록 <느닷없이(Apropos of Nothing)>를 비밀리에 계약하고 출간하려 했다.48

이들의 초기 방어 논리는 '시장 수요'24와 '편집권 독립'48이었다. 그러나 이 결정은 예상치 못한 두 방향의 공격에 직면했다. 첫째, 앨런의 아들이자 아셰트에서 자신의 책 <캐치 앤 킬(Catch and Kill)>을 출간했던 저자 로넌 패로우(Ronan Farrow)가 "나의 가족에게 피해를 준 사람의 책을 비밀리에 출간한" 출판사의 도덕성을 비난하며 관계 단절을 선언했다.36

둘째,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매개자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수십 명의 아셰트 직원들이 "우리는 우디 앨런과 함께 일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며 파업(walkout)을 감행했다.36 한 젊은 직원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존재를 직접적으로 반대하는 견해를 가진 저자"의 책을 작업하도록 요구받는 것37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이 내부 저항은 '이윤'과 '시장'이라는 타율적 논리19가 매개자 내부의 윤리적 기준에 의해 패배할 수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으며, 결국 아셰트는 출간을 취소36했다.

 

3.2.2. 마일로 야노풀로스 (사이먼 & 슈스터, 2017)

 

사이먼 & 슈스터(Simon & Schuster, S&S)가 극우 트롤이자 브라이트바트 편집자였던 마일로 야노풀로스(Milo Yiannopoulos)에게 25만 달러라는 거액의 선인세25를 지급하고 출간 계약을 맺은 것은, 매개자의 방어 논리가 얼마나 전략적인지를 보여준다.

초기 비판(주로 인종차별적, 여성혐오적 발언에 대한25)에 직면했을 때, S&S는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단체들과 함께69 "독자들이 책의 실제 내용을 읽고 판단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25며 '내용으로 판단하라'는 고전적인 방어 논리를 폈다. 저자 록센 게이(Roxane Gay)가 항의하며 자신의 책 계약을 철회하는25 등 비판이 거셌지만 S&S는 버텼다.

그러나 야노풀로스가 과거 "소년과 성인 남성 간의 관계"를 옹호하는, 즉 미성년자와의 성관계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한 영상25이 발견되자 상황은 급변했다. S&S는 '표현의 자유'나 '내용 판단'과는 무관하게 즉시 계약을 취소25했다. 이는 매개자의 '표현의 자유' 옹호가 확고한 원칙이 아니라, 인종차별은 감수할 수 있는 '상업적 리스크'였지만 소아성애 옹호는 감수할 수 없는 '상업적 독성'이었음을 증명한다. 그들의 '윤리적' 결정은 결국 '이윤'19 계산의 결과였던 것이다.

 

3.3. 사례 3: 학계의 '유산'과 '공모' (The Academy's 'Legacy' and 'Complicity')

 

학계와 학술 출판사 역시 '유산(legacy)'을 관리하고 '정전'을 해석하는 핵심적인 문화 매개자이다.

 

3.3.1. 마르틴 하이데거 ('검은 노트')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 한 명인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검은 노트(Schwarze Hefte)》49가 2014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하면서, 철학계라는 매개자 집단은 거대한 스캔들72에 직면했다. 하이데거의 나치즘 동조는 잘 알려져 있었지만50, 《검은 노트》는 그의 반유대주의가 단순한 개인적 편견이나 정치적 일탈이 아니라, '세계 유대주의(Weltjudentum)'50를 '존재사(history of Being)'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즉 그의 철학의 핵심과 깊이 연관된 '형이상학적 반유대주의'임을 드러냈다.49

이 폭로에 대해 매개자(학계와 출판사)는 '퇴각'할 수 없었다. 출판사 비토리오 클로스터만(Vittorio Klostermann)은 수십 년간 하이데거의 원고를 엄격하게 통제해왔으며52, 이 출간 자체는 통제된 폭로였다. 스캔들이 터지자, 마르틴 하이데거 학회(Martin Heidegger Society) 의장 귄터 피갈(Günter Figal)이 사임했다.74

전 세계 대학과 학술 기관(에모리 대학 등75)에서 긴급 컨퍼런스가 소집되었고, 《하이데거의 검은 노트: 반유대주의에 대한 응답》52과 같은 대응 논문집들이 출간되었다. 이는 학계라는 매개자 집단이 자신들의 핵심 '상징적 자본'(하이데거 철학)의 가치가 근본적으로 훼손되는 것을 막고, 이 '오염된' 유산을 어떻게든 '재맥락화'하거나 '비판적으로 재평가'함으로써52 매개자로서의 입장을 다시 정립하려는 필사적인 '투쟁'이었다. 그들은 하이데거를 '방어'하든, '비판'하든, '해석'하든, 어떤 식으로든 '입장 표명'을 강요당했으며, '중립'이나 '퇴각'은 불가능한 선택지였다.

 

4부: 정전화(Consecration)의 책임

 

분석은 다시 사용자의 처음 질문으로 돌아온다. 매개자는 왜 논란 앞에서 물러서서는 안 되는가? 1부에서 3부까지의 분석은 그들이 '물리적, 상징적 이익'의 수혜자일 뿐만 아니라, 그 '가치' 자체를 창조하는 '행위자'임을 보였다. 4부는 매개자의 책임이 왜 구조적으로 필연적인지를 논증한다.

 

4.1. '작품과 작가를 분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의 해체

 

문화적 논쟁은 종종 "작품과 작가를 분리할 수 있는가?"라는 이분법적이고 교착적인 질문에 갇힌다. 사회학자 지젤 사피로(Gisèle Sapiro)는 그녀의 저서 《작품과 작가를 분리할 수 있는가?(Peut-on dissocier l'œuvre de l'auteur?)》76에서 이 질문 자체가 잘못 설정되었음을 지적한다.

사피로에 따르면, "우리는 분리할 수도 있고, 할 수 없기도 하다(We can and we can't)".76 그 이유는 '저자'라는 개념 자체가 낭만주의 시대에 '창조적 독창성' 개념과 '지적 재산권'의 등장과 함께 발명된77 사회적, 법적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저자란 무엇인가?(What is an Author?)'에서 정의했듯이, '저자'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 '고유명사' 아래 일련의 담론을 통합하고 통일성을 부여하는 '저자-기능(author function)'77이다.

사피로는 흥미로운 비교를 제시한다. 우리는 의사나 변호사의 개인적 도덕성을 문제 삼으며 "그의 처방과 그를 분리할 수 있는가?"라고 묻지 않는다.79 왜냐하면 그들은 '의학'이나 '법률'이라는 '단체 기관(corporate body)' 또는 '공식 기관(formal institution)'79의 이름으로 말하며, 그들의 발언 가치는 개인의 특이성이 아니라 '집단적 권위(collective authority)'79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반면, 작가는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우리는 즉각적으로 그에게 도덕적 책임을 묻는다.79

바로 이 지점에서 문화 매개자의 본질적인 역할과 책임이 드러난다. 사피로의 분석을 따를 때, 문화 매개자(출판사, 아카데미, 갤러리)야말로 작가를 '의사'나 '변호사'처럼 '단체 기관'의 권위를 가진 존재로 '만들어주는' 바로 그 '단체 기관'이다. 출판사가 책을 출간하고, 노벨상 위원회가 상을 수여하고, 큐레이터가 전시를 여는 행위(즉, 매개 행위)는 이 '개인'의 발언을 '작품'이라는 공적 담론으로 승인하고 '축성(consecration)'11하는 행위이다. 즉, 매개자는 '저자-기능'77을 완성시키고 '상징적 가치'14를 부여하는 사회적 장치 그 자체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 '승인' 행위와 그 행위가 생산하는 가치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4.2. '형식은 중립적이지 않다': 플랫폼의 윤리학

 

매개자들은 종종 자신들이 '중립적인 플랫폼(neutral platform)'일 뿐이며, 단지 창작자에게 기회를 제공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건축(architecture) 이론과 행동경제학의 논의는 '중립적 설계'라는 개념 자체가 허구임을 증명한다.

건축 철학에서 "중립적인 건축 형태는 없다(no form of neutral architecture)"80는 주장은 오래된 명제이다. 건축가가 사용하는 도면, 단면, 평면도 등은 "수동적인 아이디어 복제 행위"가 아니라, "무엇이 사유되고 건설될 수 있는지를 형성하는" 인식론적 프레임(epistemological frames)'81 그 자체이다. 건축물은 그 설계(design)를 통해 이미 특정한 사회적, 도덕적 특징82을 구현하며, 때로는 특정 집단을 배제(architectural exclusion)하기도 한다.80

이는 행동경제학의 '선택 설계(Choice Architecture)'83 개념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선택 설계' 이론의 핵심인 '필연성 논증(inevitability argument, IA)'83은 다음과 같다. 어떤 선택 환경(choice contexts)이든 필연적으로(inevitably) 사람들의 행동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친다면, 그 환경은 중립을 가장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사람들의 '복지(welfare)를 가장 잘 증진하도록' 적극적으로 배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83

출판, 수상, 전시, 비평과 같은 모든 매개 행위는 본질적으로 '문화적 선택 설계(Cultural Choice Architecture)'이다. 노벨상 위원회가 페터 한트케에게 상을 주는 것(플랫폼 제공)은, 대중에게 '학살 부인은 문학적으로 용인될 수 있으며, 심지어 최고로 권위 있는 가치'라고 미묘하게 '넛지(nudge)'83하는 선택 설계이다. 아셰트 직원들이 우디 앨런의 회고록 출간에 파업한 것40은, "이 선택 설계(앨런 회고록 출간)는 우리의 복지(윤리적 기준과 안전)에 반한다"는 강력한 저항이었다.

따라서 사용자가 비판한 매개자의 '퇴각', 즉 '중립' 선언은 '중립'이 아니다. 그것은 현상 유지를 통해 기존의 유해한 권력 구조64와 차별적 규범을 암묵적으로 지지하도록 설계된, 가장 교묘하고 비겁하며 때로는 가장 유해한 '선택 설계'이다.

 

4.3. 결론: 불가능하지만 필연적인 매개자의 입장

 

본 보고서는 사용자의 핵심 명제, 즉 문화 매개자는 창작물과 창작자의 경제적, 상징적 가치 생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1부, 표 1), 그로부터 막대한 이익을 얻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러한 이익을 취하는 매개자들이 논란 앞에서 '예술 자율성', '저자의 죽음', '객관성', '중립' 등(2부)의 방어막 뒤로 '퇴각'하려는 시도는, 이론적으로 모순적이며(2.1), 역사적으로 기만적33이고, 현실에서 이미 파산(3부, 표 2)했음이 드러났다.

예술의 '경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84, 예술가, 전문가(매개자), 관료, 지역 공동체 등 "서로 다른 집단(different groups of actors)"85 간의 '상징적 경계 투쟁(symbolic boundaries struggles)'85을 통해 끊임없이 협상된다. 문화 매개자는 이 '투쟁'의 고상한 심판이 아니라, 그 투쟁의 한복판에 있는 핵심 참여자이다.

아프리카계 페미니스트 영화감독 아망딘 게이(Amandine Gay)의 지적86은 이 모든 논의를 날카롭게 요약한다. 그녀는 <L'antiracisme en actes(행동하는 반인종주의)>라는 기사를 인용하며, 인종차별적이라는 비판을 받은 브렛 베일리(Brett Bailey)의 쇼를 둘러싼 논쟁을 언급한다. "만약 당신이 반인종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데, 수백 명의 흑인과 아랍인들이 비난하는 프로젝트를 지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그리고 당신이 여전히 옳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당신의 인종주의에 대한 개념이 문제가 있는(problematic) 것일 수 있다."86

마찬가지로, 문화 매개자가 '예술'을 옹호한다고 주장하면서, 성폭력 피해자38, 학살 생존자43, 혹은 그들 자신의 내부 직원40의 고통스러운 목소리를 묵살하고 있다면, 그들이 옹호하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 '특권(privilege)'87과 '폭력'64일 뿐이다.

문화 매개자가 '가치로부터 물리적, 상징적 이익을 얻는 입장'(사용자의 질의)인 한, 그들은 그 가치에 내재된 도덕적, 정치적 함의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논란 앞에서 물러나는 것은 중립이 아니라, 그들의 권위를 이용한 가장 강력한 방식의 공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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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Do the profits that the publishing industry make from publishing controversial authors outweigh the backlash they may receive? - Bowen Street Press,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bowenstreetpress.com/bound-blog/2023/8/23/do-the-profits-that-the-publishing-industry-make-from-publishing-controversial-authors-outweigh-the-backlash-they-may-receive
  20. Measuring the social, economic benefits of art and culture | Penn Today,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penntoday.upenn.edu/2011-10-13/features/measuring-social-economic-benefits-art-and-culture
  21. Understanding "Death of the Author" in Literary Criticism - Bookish Bay,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bookishbay.com/death-of-the-author-theory-by-roland-barthes/
  22. The Death of the Author - Wikipedia,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en.wikipedia.org/wiki/The_Death_of_the_Author
  23. Roland Barthes declared the 'death of the author', but postcolonial critics have begged to differ - University of Wollongong,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uow.edu.au/media/2025/roland-barthes-declared-the-death-of-the-author-but-postcolonial-critics-have-begged-todiffer.php
  24. No, Hachette Cancelling Woody Allen's Book is Not Censorship - Pajiba,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pajiba.com/celebrities_are_better_than_you/no-hachette-cancelling-woody-allens-book-is-not-censorship.php
  25. Simon & Schuster cancels Milo Yiannopoulos' book | Racism News - Al Jazeera,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aljazeera.com/news/2017/2/21/simon-schuster-cancels-milo-yiannopoulos-book
  26. Narrative Transactions - Does the Law Need a Narratology,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openyls.law.yale.edu/server/api/core/bitstreams/0073c9f8-be58-47e5-a7e6-ca21356a139b/content
  27. Les Trois Visionnaires: The Narrative of Balzac, Flaubert, and Zola - Rollins Scholarship Onlin,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scholarship.rollins.edu/cgi/viewcontent.cgi?article=1012&context=mls
  28. Style as a "[M]anner of Seeing": The Poetics of Gustave Flaubert - Scholars Crossing,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digitalcommons.liberty.edu/cgi/viewcontent.cgi?article=1139&context=masters
  29. Madame Bovary on Trial - OAPEN Home,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library.oapen.org/bitstream/handle/20.500.12657/62047/9781501720017.pdf?sequence=1&isAllowed=y
  30. Ethical Criticism of Art -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iep.utm.edu/ethical-criticism-of-art/
  31. Ethical Autonomism: The Work of Art as a Moral Agent - RISD Digital Commons,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digitalcommons.risd.edu/liberalarts_contempaesthetics/vol2/iss1/10/
  32. AN ART FOR ART'S SAKE OR A CRITICAL CONCEPT OF ART'S AUTONOMY? AUTONOMY, ARM'S LENGTH DISTANCE AND ART'S FREEDOM Josefine Wikström - Tidsskrift.dk,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tidsskrift.dk/nja/article/download/140120/184110
  33. Autonomies of Art and Culture - OpenEdition Journals,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journals.openedition.org/bssg/329?lang=en
  34. The 'Most Ideal' Peter Handke? in - Brill,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brill.com/view/journals/jwl/9/1/article-p133_9.xml?language=en
  35. Arguing for Art, Debating Censorship - Metacritic Journal,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metacriticjournal.com/article/118/arguing-for-art-debating-censorship
  36. Ronan Farrow drops Hachette, employees walk out (This week in books) - Nathan Bransford,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nathanbransford.com/blog/2020/03/ronan-farrow-drops-hachette-employees-walk-out-this-week-in-books
  37. 'If publishers become afraid, we're in trouble': publishing's cancel culture debate boils over,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21/jun/03/if-publishers-become-afraid-were-in-trouble-publishings-cancel-culture-debate-boils-over
  38. Polanski's 'Oscar' divides elite world of French cinema - The Guardian,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theguardian.com/film/2020/mar/01/roman-polanski-cesar-award-jaccuse-divides-french-cinema
  39. Leadership of 'French Oscars' resigns amid Polanski controversy - The Guardian,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theguardian.com/film/2020/feb/14/leadership-of-french-oscars-resigns-amid-polanski-controversy
  40. Woody Allen's book could signal a new era in the publishing industry | The Outline,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theoutline.com/post/8789/woody-allen-book-hachette-walk-out
  41. A philosophical guide on how to manage dangerous art | Aeon Essays,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aeon.co/essays/a-philosophical-guide-on-how-to-manage-dangerous-art
  42. The Social Nature of Offense and Public Protest over Art and Culture,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giarts.org/article/social-nature-offense-and-public-protest-over-art-and-culture
  43. Transnational Activism against Genocide Denial: Protesting Peter Handke's Nobel Prize in Literature | Nationalities Papers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cambridge.org/core/journals/nationalities-papers/article/transnational-activism-against-genocide-denial-protesting-peter-handkes-nobel-prize-in-literature/A80BD5A45E0EB1D8786779B4CF90104A
  44. A Literary Consecration of Genocide Denial - New Lines Magazine,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newlinesmag.com/review/a-literary-consecration-of-genocide-denial/
  45. Swedish Academy defends Peter Handke's controversial Nobel win - The Guardian,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19/oct/21/swedish-academy-defends-peter-handkes-controversial-nobel-win
  46. France's Polanski problem: Can you separate the artist from the man? - CGTN,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news.cgtn.com/news/2020-03-20/France-s-Polanski-problem-Can-you-separate-the-artist-from-the-man--P1jA4Dgmbe/index.html
  47. 45th César Awards - Wikipedia,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en.wikipedia.org/wiki/45th_C%C3%A9sar_Awards
  48. Ronan Farrow Cuts Ties With Hachette Over Woody Allen Memoir - Time Magazine,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time.com/5795400/ronan-farrow-publisher-woody-allen-memoir/
  49. Assessing the significance of Heidegger's Black Notebooks - GH,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gh.copernicus.org/articles/73/109/
  50. Heidegger's 'black notebooks' reveal antisemitism at core of his philosophy - The Guardian,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14/mar/13/martin-heidegger-black-notebooks-reveal-nazi-ideology-antisemitism
  51. Heidegger's Black Notebooks and The Question of Anti-Semitism - Ereignis,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beyng.com/papers/HC2015Adrian.html
  52. Heidegger's Black Notebooks: Responses to Anti-Semitism | Reviews,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ndpr.nd.edu/reviews/heideggers-black-notebooks-responses-to-anti-semitism/
  53. Nobel winner Peter Handke avoids genocide controversy in speech - The Guardian,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19/dec/07/nobel-winner-handke-avoids-genocide-controversy-in-speech
  54. 'Gross hypocrisy': Nobel heavyweight to boycott Peter Handke ceremony | Nobel prize in literature | The Guardian,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19/dec/06/nobel-swedish-academy-peter-handke-ceremony-peter-englund-literature
  55. 'A troubling choice': authors criticise Peter Handke's controversial Nobel win - The Guardian,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19/oct/10/troubling-choice-authors-criticise-peter-handke-controversial-nobel-win
  56. Peter Handke and the power of denial | Opinions - Al Jazeera,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aljazeera.com/opinions/2019/12/10/peter-handke-and-the-power-of-denial
  57. Morality on the Side: Peter Handke and the Nobel Prize - The Prindle Institute for Ethics,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prindleinstitute.org/2019/10/morality-on-the-side-peter-handke-and-the-nobel-prize/
  58. France's #MeToo debate intensifies as Roman Polanski wins best director César | News,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screendaily.com/news/frances-metoo-debate-intensifies-as-roman-polanski-wins-best-director-cesar/5147742.article
  59. Césars 2020 : « C'est la honte ! » - UNSA‑Education.com,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unsa-education.com/article-/cesars-2020-cest-la-honte/
  60. « C'est [toujours] la honte ! » - NPA Révolutionnaires,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npa-revolutionnaires.org/cest-toujours-la-honte/
  61. Adèle Haenel - Wikipedia,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en.wikipedia.org/wiki/Ad%C3%A8le_Haenel
  62. Adèle Haenel retires over French film sector's 'complacency' towards sexual predators,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theguardian.com/culture/2023/may/09/adele-haenel-retires-over-french-film-sectors-complacency-towards-sexual-predators
  63. Anti-Polanski protesters greet French film awards ceremony - CBS News,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cbsnews.com/news/roman-polanski-protesters-greet-french-film-awards-ceremony/
  64. CÉSARS: TIME TO GET UP AND GET OUT - The White Review,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thewhitereview.org/feature/cesars-time-to-get-up-and-get-out/
  65. The Emptiness Of Literature Written For The Market - Noema Magazine,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noemamag.com/the-emptiness-of-literature-written-for-the-market/
  66. Why Hachette were wrong to drop Woody Allen's memoir - The Spectator,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spectator.co.uk/article/why-hachette-were-wrong-to-drop-woody-allens-memoir/
  67. Woody Allen memoir published in US after protest stops first attempt - The Guardian,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theguardian.com/film/2020/mar/23/woody-allen-memoir-published-in-us-apropos-of-nothing
  68. What recent publishing controversies say about the industry - Nathan Bransford,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nathanbransford.com/blog/2023/05/what-recent-publishing-controversies-say-about-the-industry
  69. Free-speech groups defend publication of Milo Yiannopoulos memoir - The Guardian,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17/jan/06/free-speech-groups-defend-publication-of-milo-yiannoploulos-memoir
  70. Free Speech Groups Release Statement in Support of Publisher of Milo Yiannopoulos' Book; UPDATE: NCAC Responds to Cancellation of Milo's Book,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ncac.org/news/blog/free-speech-groups-release-statement-in-support-of-publisher-of-milo-yiannopoulos-book
  71. Milo Yiannopoulos drops lawsuit over his cancelled book - The Guardian,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18/feb/20/milo-yiannopoulos-drops-lawsuit-over-his-cancelled-book
  72. The King Is Dead: Heidegger's “Black Notebooks” | Los Angeles Review of Books,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lareviewofbooks.org/article/king-dead-heideggers-black-notebooks/
  73. National Socialism, World Jewry, and the History of Being: Heidegger's Black Notebooks,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jewishreviewofbooks.com/articles/993/national-socialism-world-jewry-and-the-history-of-being-heideggers-black-notebooks/
  74. Martin Heidegger Society Chair Steps Down After Reading the Black Notebooks - Reddit,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reddit.com/r/philosophy/comments/2t2k4d/martin_heidegger_society_chair_steps_down_after/
  75. Heidegger's 'Black Notebooks' to be focus of Emory conference,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news.emory.edu/stories/2014/08/upress_heidegger_conference/index.html
  76. Can author and work be separated? - - Aterraeredonda,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en.aterraeredonda.com.br/autor-e-obra-podem-ser-separados/
  77. Morality of the Author, Morality of the Work - Electra Magazine,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electramagazine.fundacaoedp.pt/index.php/en/editions/issue-22/morality-author-morality-work
  78. Can We Dissociate the Work from the Author? A Conversation with Gisèle Sapiro,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collegium.ethz.ch/events/fellow-year-2024-2025/gisele-sapiro
  79. This author's work - minor reviews - WordPress.com,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geomsoc.wordpress.com/2021/03/04/this-authors-work/
  80. Architectural Exclusion: Discrimination and Segregation Through Physical Design of the Built Environment | Yale Law Journal,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yalelawjournal.org/article/architectural-exclusion
  81. The Project as Argument: What is Architectural Thinking? | ArchDaily,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archdaily.com/1033636/the-project-as-argument-what-is-architectural-thinking
  82. Philosophy of Architecture,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plato.stanford.edu/entries/architecture/
  83. The inevitability argument for choice architecture and the evidence-based view | Behavioural Public Policy | Cambridge Core,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cambridge.org/core/journals/behavioural-public-policy/article/inevitability-argument-for-choice-architecture-and-the-evidencebased-view/1B7835D90C71B7F762FF4A19E195FB80
  84. Do you think that art has boundaries? - ResearchGate,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researchgate.net/post/Do-you-think-that-art-has-boundaries
  85. Full article: Public art debates as boundary struggles - Taylor & Francis Online,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tandfonline.com/doi/full/10.1080/10286632.2021.2009472
  86. “You'll be Dazzled by My Joy” : Interview with Afrofeminist Filmmaker Amandine Gay | AWID,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awid.org/news-and-analysis/youll-be-dazzled-my-joy-interview-afrofeminist-filmmaker-amandine-gay
  87. The Complexities of Supporting Art by Problematic Artists | by RU Student Life | Call Me a Theorist | Medium,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medium.com/call-me-a-theorist/the-complexities-of-supporting-art-by-problematic-artists-989827511f6b
  88. The Problems With Censoring Problematic Art | by Mackenzie Amanda Darnielle - Medium,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medium.com/@rocknrollgeek1975/the-problems-with-censoring-problematic-art-cec663b2d9d9

 

 

 


제 1부: 건축가적 참조의 틀: 새로운 비평 장치

 

한 건축가가 제시한 텍스트는 단순한 의견 개진을 넘어, 현대 건축 이론을 위한 새롭고 강력한 비평적 장치의 토대로 기능한다. 그가 제시한 '전거(典據)', '근거(根據)', '준거(準據)'라는 세 가지 구분은 '영감' 대 '표절'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 현대 건축 실무의 병리적 현상을 해부하는 데 필요한 정교한 어휘를 제공한다.

 

'질문'에 대한 엄밀한 해독

 

모든 분석은 저자(이하 '필자')가 받은 모호한 "질문"("한국 건축가들의 '참조와 인용'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서 시작된다. 필자의 에세이 전체는 이 질문에 대한 고도의 해체 작업으로 볼 수 있다. 이 질문의 모호함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른 세 가지 건축적 사유 방식을 구분하지 못하는 현 담론의 실패를 증명하는 증상이다. 필자는 이 모호한 질문을 세분화함으로써 비평의 대상을 명확히 한다.

 

핵심 용어의 정립

 

이 보고서는 필자가 제시한 세 가지 핵심 용어를 분석의 개념적 틀로 사용한다.

  • 전거(典據, Jeon-geo): '출처' 또는 '아카이브'. 감각적이고 즉각적이며 "예쁜" 것들의 영역.
  • 근거(根據, Geun-geo): '기반' 또는 '개념'. 프로젝트에 한정된 논리적, 기술적 프레임워크. 파티(parti).
  • 준거(準據, Jun-geo): '규범' 또는 '정신'. 프로젝트를 초월하며, 안정적이고, 철학적이며, 윤리적인 건축가의 "땅".

 

핵심 표: 건축 참조의 3가지 프레임워크

 

필자의 주장은 밀도 높고 그 정의는 매우 정밀하다. 다음 표는 이 새로운 용어 체계를 독자에게 명확하고 즉각적이며 지속적인 지도로 제공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학술적 도구이다. 이는 그의 미묘한 정의를 직접적인 비교 구조로 결정화하며, 보고서의 나머지 분석 과정에서 시금석 역할을 할 것이다.

 

특징 전거 (典據 - '출처') 근거 (根據 - '기반') 준거 (準據 - '규범')
핵심 정의 재료, 아카이브, 출처 기반, 개념, 파티(parti) 규범, 정신(Ethos), "땅"
범위 부분적, 세부적, 파편적 (한 프로젝트 내) 전체적 (건축가의 작품세계 전체) 총체적
시간성 즉각적, 순간적, 일시적 프로젝트 한정적, 임시적 안정적, 장기적, 획득된 것
본질 감각적, 직관적 ("예쁘다") 논리적, 기술적, 공간적 철학적, 윤리적, 인격적
핵심 은유 핀터레스트 검색 1 "트랙", "컨셉" "땅", "토양", "휴전 상태"
대체 가능성 무한히 대체 가능, 우연적 (프로젝트별로) 대체 가능 대체 불가능 (건축가를 정의함)
비평 대상 여부 아니오. ("비난해봐야 무용하다") 예. (기술적, 논리적 비평) 예. (본질적, 윤리적 비평)
문제점 준거가 없을 시 이것의 "노예"가 됨 "구조주의적 공간" 같은 모호한 개념은 무용함 핵심적 실패: 이것을 숨기거나, 속이거나, 부재함

제 2부: '전거' (Jeon-geo): 대체 가능한 이미지의 폭정

 

이 섹션은 필자의 전거 개념을 현대 이미지 중심 문화에 대한 날카롭고 직설적인 비판으로 분석한다. 그는 전거를 디자인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가져온", "대체 가능하고", "즉흥적이며", "감각적인" 재료(예: 핀터레스트)로 정의한다. 그는 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데, 그 선택 자체가 본질적으로 우연적이기 때문이다.

 

건축의 '핀터레스트화' (Pinterestification)

 

필자의 추상적인 전거 개념은 디지털 이미지 플랫폼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 데이터: "디자인의 핀터레스트화" 1는 "미학적 동질성" 1을, 그리고 "테라조 바닥, 아치형 출입구, 홈이 파인 패널, 재팬디 인테리어의 끝없는 흐름" 1을 초래했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말하는 "그 무엇이라도 상관 없었을지도 모르는" 전거의 세계이다.
  • 분석: "건축 콘텐츠에 대한 접근의 민주화" 2전거의 무한한 아카이브를 생성했다. 필자의 핵심 통찰은 이것이 새로운 문제가 아니라 증폭된 문제라는 것이다. 그가 찾을 수 있는 "좋은 것"의 "1%"는 이제 "나의 인식 범위를 넘어서는 무한한 수"를 의미하며, 이는 특정 선택을 통계적으로 무의미하게 만든다.

 

'감식안'의 해체

 

필자는 "감식안"을 이러한 우연적 선택 과정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행위로 일축한다.

  • 분석: 이는 "취향"이라는 건축가의 자기 신화에 대한 정면 공격이다. 전거 중심의 세계에서 "취향"은 깊은 이해가 아니라 고속 필터링 알고리즘일 뿐이다. 인터넷 미학의 "바이럴 유행" 4이 완벽한 예이다. 전거에 대해 특별한 "눈"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건축가는 필자의 관점에서 "포장하는 이들"에 불과하다.

 

전거 비판이 무용한 이유 (심층 분석)

 

이 섹션에서 필자의 가장 급진적인 주장은 전거를 비판하는 것이 "무용하다"는 것이다. 이는 "복사-붙여넣기 건축" 1을 비판하는 평론가들의 일반적인 태도와 상반된다.

  • 심층 분석:
  1. 1의 필자와 같은 비평가는 "소셜 미디어 미학의 구토물"(테라조 등)을 그 자체로 윤리적 또는 미학적 실패로 간주한다.
  2. 그러나 필자는 이를 범주 오류로 본다. 전거(테라조)는 항상 우연적이다. 진정한 실패는 테라조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 선택을 지배하고, 종속시키고, 의미를 부여하는 시스템(근거 또는 준거)의 부재이다.
  3. 따라서 테라조를 비판하는 것은 핵심을 놓친 것이다. 건축가는 핀터레스트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말하듯이, "모든 선택에 어떠한 상관관계(=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쪽이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이다.
  4. 이는 모든 논쟁의 프레임을 바꾼다. 문제는 핀터레스트의 사용 3이 아니라, 상위 개념의 부재 속에서 그것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제 3부: '근거' (根據): 프로젝트와 그것을 지배하는 개념

 

이 섹션은 필자가 프로젝트에 한정된, 총체적인 "컨셉" 또는 "트랙"으로 정의한 근거를 탐구한다. 이는 전거의 "무작위성"에 "법칙을 부여하는" *파티(parti)*의 영역이다. 그는 근거가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건축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올지아티의 명령: 개념은 공간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필자는 강력한 근거의 모범으로 발레리오 올지아티(Valerio Olgiati)를 인용한다.

  • 데이터: 올지아티의 작업은 엄격하고 금욕적인 비전으로 정의된다.6 그는 "하나의 아이디어" 7에 기반한 "순수성" 9과 "조직화된 경험" 10을 추구한다. 그의 근거는 모호한 테마가 아니라 총체적인 공간 논리이다.
  • 분석: 이는 필자의 구별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그는 올지아티의 (주장된) "컨셉은 공간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는 말을 칭찬하며, "구조주의적인 공간"과 같은 근거는 "아무 전거도 통제하지 못한다"고 일축한다. 올지아티의 "엄격한 콘크리트 공간" 6은 모든 후속 선택을 지배할 만큼 "충분히 구체적"이기 때문에 좋은 근거이다. 그것이 바로 필자가 묘사하는 "트랙"을 만든다.

 

'근거' 사례 연구: '파티오'와 김건호 교수

 

  • 데이터: 필자는 "김건호 교수님의 영향을 받은, 나를 포함한 이들이 사용하는 '파티오'라는 단어"를 인용한다. '파티오'에 대한 연구는 그것이 디자인 요소임을 보여준다.11 그러나 '김건호'에 대한 조사는 그가 실무 건축가(SGHS14)이자 교수(홍익대16)임을 드러낸다. 15은 이 건축가가 '서울 대청'을 도시와 연결되며 파티오처럼 기능하는 "가변적 공간"으로 논의하는 것을 보여준다.
  • 심층 분석: 이것은 내부자의 참조이다. 여기서 '파티오'는 단순한 안뜰이 아니다. 이는 필자가 속한, 김건호 교수가 가르치는 14 특정 교육적 또는 이론적 프레임워크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많은 전거를 통제할 수 있는" (마치 9-스퀘어 그리드처럼) 프로젝트에 적용될 수 있는 공유된 학문적 도구이자 엄격한 근거로서 기능한다. 필자가 제시한 좋은 근거의 예("중정을 두 개 가진 3층 집")는 이러한 파티오 중심의 근거를 직접적이고 실용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생성적 긴장: 근거 대 전거

 

  • 데이터: 필자는 "자유로운 전거"와 "꿰매는 근거" 사이의 "긴장 관계"를 묘사한다. 그는 "훌륭한 작품"이 이 긴장을 유지하는 작품이라고 가정한다.
  • 분석: 이 개념은 건축 이론의 핵심이다. 파티(근거)는 "일관성과 통일성" 17을 부여하는 "중심 아이디어" 18이다. 세부 사항(전거)은 "시각적 흥미"와 "역동적 긴장" 17을 제공한다.
  • 데이터 연결:
  • 20는 개념이 세부 사항을 테스트하는 데 사용되는 "통합 아이디어"라고 말한다: "이것이 컨셉과 맞는가?" 이는 정확히 "끊임없이 '그것의 근거'를 요구하는" 필자의 근거와 일치한다.
  • 21는 건축가들이 "요소들의 패치워크"(전거)를 피하기 위해 "일관된 건축 스타일"(근거)을 고수한다고 설명한다. 이는 근거전거를 "꿰매는" 완벽한 사례이다.
  • 필자의 미해결 질문—"근거에 대한 전거의 위반... 이것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는 아직 모른다"—은 모든 디자인의 본질적인 투쟁을 보여준다: "규칙"(근거)을 깨는 세부 사항이 언제 실수(mistake)가 아닌 천재성(genius)의 순간이 되는가?

제 4부: '준거' (準據): 건축가의 윤리적 토대

 

이 섹션은 필자 에세이의 철학적 핵심인 준거를 분석한다. 그는 이것을 건축가의 근본적인 "땅" 또는 "토양"으로 정의한다. 이것은 프로젝트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안정적이고, 개인적이며,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생각의 고통스러운 확장 이후에 온 것"이며 "모든 반박들을 견뎌낸" 윤리적, 철학적 입장이다.

 

실천의 '토양': 전쟁에서 태어난 윤리

 

  • 분석: 필자의 은유는 강렬하고 심오하다. 준거는 격렬한 내면의 "전쟁" 이후의 "휴전 상태"이다. 그것은 "수많은 대안들을 쳐내다가" "손아귀에 어쩌다보니 남게 된 단 하나의 선택지"이다. 이 프레임워크는 건축 철학을 수동적인 "스타일"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어렵게 획득되며, 윤리적인 입장으로 재구성한다.

 

예시 1: 루이스 칸의 아포리즘으로서의 '준거'

 

  • 데이터: 필자는 "루이스 칸의 아포리즘"을 인용한다. 연구 자료는 전체 인용문을 제공한다: "당신이 벽돌에게 말한다. '벽돌아, 너는 무엇이 되고 싶니?'... 벽돌은 답한다. '나는 아치가 되고 싶어.'".22
  • 분석: 이것은 준거완벽한 예이다.
  • 이것은 전거가 아니다: 칸은 벽돌이 "예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이것은 근거가 아니다: 단일 프로젝트를 위한 개념이 아니다.
  • 이것은 준거이다: 이것은 "구조적 진실성" 24과 "재료를 존중하는" 23 것에 대한 근본적이고 윤리적인 입장이다. 그것은 그의 작품세계 전체를 지배하고 "도덕적, 윤리적" 나침반 24 역할을 하는 "철학" 25이다.

 

예시 2: 미스의 평면도로서의 '준거'

 

  • 데이터: 필자는 "미스의 평면"을 인용한다. 연구에 따르면 미스는 그의 철학에 대해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26고 한다. "나의 주된 작업은 건물을 계획하는 것이었다.".26 그의 철학은 "진실" 27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 분석: 이것은 필자의 숭고한 통찰이다. 미스에게 준거는 건축에 관한 텍스트가 아니었다. 준거는 평면에 구현된 건축 그 자체였다.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의 평면 28은 현현한 준거이다: "철학적 토대" 27에 뿌리를 둔 완전한 "미학적 건축 언어" 30를 보여주는 "현상학적 도구".28

 

준거의 본질: 비(非)텍스트적 정신(Ethos)

 

  • 심층 분석: 필자의 예시들(칸의 우화, 미스의 침묵하는 평면)은 많은 것을 드러낸다. 그는 또한 "집 앞 고기 가게의 서비스 정신"이나 "어머니가 툭 던진 한 마디"를 포함한다.
  • 분석의 흐름:
  1. 필자는 준거가 "이성적 공격과 감성적 반복"의 결과물이라고 주장한다.
  2. 이는 준거가 반드시 공식적이고 학술적이며 글로 쓰인 철학일 필요는 없음을 의미한다.
  3. 그것은 *체화된 정신(ethos)*이다. 그것은 어길 경우 "죄책감을 느끼게 될" "나와 계약을 맺은 어떤 것"이다.
  4. 이것이 그가 그것을 "윤리"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그것은 모든 이성적 공격에서 살아남은, 이성 이전(pre-rational) 또는 이성 이후(post-rational)의 토대이다. 그것은 건축가의 협상 불가능한 "진실성(integrity)"이다.31

제 5부: 논쟁: '준거' 은폐의 윤리적 실패

 

이 섹션은 보고서의 정점으로, 필자가 "문제"로 규정한 것을 다룬다. 그는 전거근거는 "숨겨도 상관없다"고 하지만, "준거를 숨기는 것...은 문제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 섹션은 그의 비판을 현대 건축 담론의 병폐에 대한 연구 자료와 통합한다.

 

'문제': '영구적 휴전'과 비평의 거부

 

  • 분석: 필자의 중심 논지는 탁월하다. 그는 자신의 준거를 숨기는 건축가들이 "외부에서 내게 침투할지도 모르는 더 나은 명분을 차단"하려 애쓰는 "영구적인 휴전 상태"에 있다고 주장한다.
  • '비평 면책'의 메커니즘 (심층 분석):
  • 분석의 흐름:
  1. 필자는 "준거가 없거나" "거짓말하는" 건축가들은 "근본적으로 비평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2. 이 메커니즘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만약 한 건축가의 작품이 비판받는다면, 그는 이를 회피할 수 있다.
  3. 전거에 대한 비판 (예: "당신의 건물은 못생겼다"): 건축가는 "그것은 대체 가능하고 우연적인 선택이다. 무관하다"고 답한다 (필자 자신이 주장하듯이).
  4. 근거에 대한 비판 (예: "당신의 개념은 결함이 있다"): 건축가는 "그 개념은 프로젝트를 위한 것이었다. 내 다음 프로젝트는 다른 개념을 가질 것이다"라고 답한다.
  5. 유일하게 유효하고 중요한 비판은 준거에 대한 비판이다: "당신의 근거(이 프로젝트)는 당신이 공언한 준거(당신의 윤리)와 모순된다." 또는, "당신의 준거(당신의 윤리) 자체가 결함이 있다."
  6. 따라서 준거숨김으로써, 건축가는 이 본질적이고 윤리적인 비판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것이 궁극적인 "윤리적 실패"이다. 이는 "진실성"의 실패이며 31, 건축의 "사회적, 도덕적 특성" 34으로부터의 후퇴이다.

 

병리 1: 사후 합리화의 '거짓말'

 

  • 데이터: 필자는 "사후적으로 스스로에게 부여한 거짓된 종합"을 비난한다. 이는 사후 합리화(post-rationalization)의 정확한 정의이다.
  • 분석: BIG와 같은 회사에 대한 비평가들은 "지적 체면의 겉치레" 35를 제공하기 위해 "진정한 생성이 아닌 사후 합리화의 정신으로" 35 컴퓨테이션을 사용한다고 지적한다.35 유명한 "다이어그램" 36은 어쩌면 전거 중심의 형태적 움직임이었을지도 모르는 것에 사후적으로 적용된 근거(혹은 심지어 준거)이다. 이것이 필자가 식별한 "거짓말"이다.

 

병리 2: '스타키텍트'의 '부재'

 

  • 데이터: 필자는 "전거근거의 노예"에 불과한 "준거가 없는 이들"을 비판한다. 이는 "스타키텍트" 현상을 완벽하게 설명한다.
  • 분석: "스타키텍트" 브랜드 37준거대체재로 기능한다. 렘 콜하스(Rem Koolhaas)의 "책, 강의, 철학"은 "건축계에서 가장 정교한 마케팅 캠페인에 불과하다"고 비판받는다.40 이러한 "브랜딩" 39준거를 외부 지향적으로 시뮬레이션한 것이지만, 필자가 요구하는 내적이고 "전쟁으로 찢어진"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윤리적 핵심이 없는 "서명" 38일 뿐이다.

 

병리 3: 형식주의 대 윤리

 

  • 데이터: 필자의 텍스트는 건축 비평을 형식주의(formalsim, 즉 전거근거의 연구)에서 윤리(준거의 연구)로 이동시키라는 암묵적인 요구이다.
  • 분석: 형식주의는 종종 "사회적 책임, 감정적 내용"과 같은 "다른 무언가의 부재를 암시하기 위해" 사용된다.41 필자는 바로 이 "다른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다. 그는 건축의 "사회적, 도덕적 특성" 34을 인식하고 "미학적 문제" 32를 넘어서려는 철학적 전환 32에 동참하고 있다. 그의 준거는 바로 그 사회적/도덕적/윤리적 책임이다.

제 6부: 결론: 건축가 자신의 '준거'로서의 선언문

 

이 결론 섹션은 필자의 분석적 렌즈를 그 자신의 텍스트로 되돌릴 것이다. 이 에세이 자체가 그것이 요구하는 건축적 윤리의 수행적 행위임을 주장할 것이다.

 

한국적 맥락: '땅'을 찾아서

 

  • 데이터: 한국 건축가로서 "땅"을 찾으려는 필자의 탐구는 깊은 울림을 갖는다. 한국 현대 건축의 기초를 놓은 김수근(Kim Swoo-geun) 42은 "건축이 고유한 개념과 철학을 가져야 한다고 선포한" 44 한국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한국의 전통을 현대 건축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거대한 집념" 44을 가지고 있었다.
  • 분석: 필자의 텍스트는 이러한 "거대한 집념"의 직접적인 연속이다. 그는 단순히 "전통 양식" 45이나 "국가적 이미지" 45전거가 아닌, 진실하고 비판적이며 철학적인 "땅" 44으로서의 준거를 찾고 있다.

 

공개의 윤리: 수행적 '준거'로서의 텍스트

 

  • 분석: 필자는 자신이 비판한 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준거를 숨기지 않는다. 마지막 문단에서 그는 그것을 노골적으로 선언한다: "이 생각은 나의 준거이다. 내가 속한 땅이다."
  • 이것은 지적, 윤리적 진실성의 궁극적인 행위이다. 그는 "영구적인 휴전 상태"에 있지 않다. 그는 "더 나은 준거"를 가진 "누군가가 찾아와... 나를 이끌지 않을까"하는 비판을 초대할 명시적인 목적으로 자신의 준거를 공개했다.

 

마지막 초대: 오픈소스화된 정신(Ethos)

 

  • 심층 분석: 필자의 마지막 용기 있는 입장은 그의 철학 전체의 구현이다. "스스로 내가 돌본 꽃들을 짓밟고" "미련 없이 떠나리라"는 그의 의지는, 그가 비판하는 "외부의 더 나은 명분을 차단하려는" 건축가들과 정반대이다.
  • 결론: 따라서 그의 텍스트는 단순한 학술적 프레임워크가 아니라 선언문이다. 그것은 "내면의 전쟁"을 치르고, "휴전 상태"(준거)를 확립했으며, 가장 중요하게는 그것을 공개할 31 용기를 가진 한 건축가의 수행적 시연이다. 그는 더 윤리적인 건축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 바로 그 아이디어의 "전쟁"을 초대하며 자신의 "땅"을 완전히 드러내 보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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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Aesthetic Trends and Accessibility: Interior Design in the Age of Social Media | ArchDaily,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archdaily.com/998678/aesthetic-trends-and-accessibility-interior-design-in-the-age-of-social-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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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Valerio Olgiati – TLmagazine, 11월 6, 2025에 액세스, https://www.tlmagazine.com/valerio-olgi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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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비평의 난관과 '옳음'의 건축

 

시게루 반(Shigeru Ban)과 같은 건축가를 비평하는 것은 특정한 난관에 부딪힌다. 이는 프라이 오토(Frei Otto)나 버크민스터 풀러(Buckminster Fuller)를 순수한 건축의 관점에서 비평하기 어려운 것과 유사하다. 반이 긴자에 설계한 상업 건물과 같은 프로젝트는 전통적인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그가 재난 현장에서 지관(紙管, paper tube)을 사용해 지은 건축물들은 기존의 평가 기준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미학적 판단의 대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해결책'으로 존재한다. 이 어려움 자체가 시게루 반 건축의 핵심적 사실, 즉 그의 건축은 '옳다'는 명제를 드러낸다.

그의 작업은 미학이나 양식의 문제가 아니라, 모더니즘의 핵심 강령이었던 '의식'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르 코르뷔지에가 도시와 건축의 실패가 사회악의 근원이라 믿었듯, 시게루 반은 "사람들이 건물로 인해 죽고 있다"고 담담히 말하며 건축의 혁명을 통해 사회를 옳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모더니스트의 사회적 책임을 계승한다. 이 보고서는 시게루 반의 작업을 '작품 활동'과 '사회적 참여'라는 이중적 구조로 분석하고, 이 두 축이 어떻게 그의 독창적인 '도덕적 합리주의'로 수렴되는지, 그리고 왜 그의 작업이 전통적인 건축 비평의 형식을 무력화하는 '반(反)건축'의 특성을 띠는지 논증할 것이다.

 

제1장 이중적 실천: 작가와 인도주의자

 

시게루 반 스스로가 설명하듯, 그의 작업은 '작가'로서의 미학적 탐구와 '참여자'로서의 인도주의적 실천이라는 두 개의 뚜렷한 축으로 나뉜다.

 

1.1 '작품 활동': 작가적 언어와 그 계보

 

그의 '작품 활동'은 알바 알토(Alvar Aalto) 전시회 인테리어 같은 초기 작업에서부터 뉴질랜드의 카드보드 대성당(Cardboard Cathedral)이나 프랑스의 상업적 랜드마크인 상트르 퐁피두-메츠(Centre Pompidou-Metz)에 이르기까지, 고도로 세련된 '작가적' 언어를 보여준다.

반은 자신의 스타일적 참조점이 쿠퍼 유니언(Cooper Union)의 존 헤이덕(John Hejduk), 그리고 리처드 노이트라(Richard Neutra)와 같은 '서부 해안 스타일'의 모더니스트들로부터 유래했다고 밝힌다. 헤이덕은 '뉴욕 파이브'의 일원으로서 건축의 형태 어휘 자체에 대한 시적이고 실험적인 탐구로 유명하며, 특히 헤이덕의 '종이 건축(paper architecture)' 개념은 반이 종이라는 재료의 구조적 가능성을 탐구하는 데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또한 헤이덕이 교육에 도입한 '9그리드 문제(nine-square grid problem)'는 건축의 기본 요소(그리드, 프레임, 면, 볼륨)를 탐구하는 기본적인 훈련 방식이다.

캘리포니아의 모더니스트들은 모더니즘의 산업적 미학을 토대로 하되, 기후와 문화에 조응하는 지역적 양식을 구축하려 했다. 이러한 배경은 반의 '작가적' 작업이 순수한 기하학적 유희와 재료의 물성 탐구, 그리고 서구 모더니즘의 계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1.2 '사회적 참여': 프라이버시라는 근본적 권리

 

반의 또 다른 축인 '사회적 참여'는 르완다 내전, 동일본 대지진, 아이티 대지진, 우크라이나 전쟁, 튀르키예 지진 등 전 세계의 비극의 현장을 대상으로 한다. 그는 NGO인 자발적 건축가 네트워크(VAN)를 설립하여 임시 주거와 공동체 시설을 공급해왔다.

이 활동의 핵심에는 "프라이버시는 인간의 기본 원리"라는 그의 신념이 있다. 재난 상황에서 프라이버시는 종종 사치스러운 것으로 치부되지만, 반은 이것이 개인의 존엄성이자 정치적 행동의 기초임을 인지한다. 그는 재난 대피소의 열악한 환경이 거주자들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위협하며, 특히 프라이버시가 없는 환경은 여성들이 대피소 입소를 꺼리게 만들어 2차 피해를 유발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의 '종이 칸막이 시스템(Paper Partition System, PPS)'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건축적 응답이다. 종이 튜브와 천으로 만들어진 이 간단한 모듈형 시스템은 대피소 내부에 최소한의 개인 영역을 확보해준다. 이는 최인훈의 소설 《광장》이 제시하는 '광장(Gwangjang, 공적 영역)'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밀실(Mil-sil, 사적 영역)'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변증법적 통찰과 정확히 일치한다. 반은 사회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최소한의 '밀실'을 제공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재난 이후 공동체 회복('광장')의 의지를 고양한다.

 

제2장 통일된 에토스: 합리성, 공학, 그리고 사랑

 

시게루 반의 천재성은 이 두 개의 분리된 듯한 실천('작품'과 '참여')을 하나의 일관된 윤리적, 방법론적 체계로 통합하는 데 있다.

 

2.1 글로벌 합리주의와 '형태 찾기'

 

반의 작업에서 '지역성'은 철학적 원인이 아니라 합리적 선택의 '결과'이다. 그가 재난 현장에서 파벽돌, 플라스틱 상자, 혹은 종이 튜브를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로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가장 '값이 싸고, 수급이 쉬우며, 다루기 편한' 재료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 누구보다 철저한 글로벌 건축가이며, 가장 합리적인 것을 택하려는 그의 의지가 때로 지역적 재료의 사용으로 귀결될 뿐이다.

그의 미학은 '형태 만들기(form-making)'가 아니라 프라이 오토가 말한 '형태 찾기(form-finding)'에 가깝다. 그는 재료의 효율적 활용과 구조적 강성을 우선시하며, 목조 구조물을 보호하던 방수포를 더 가볍고 질긴 탄소 섬유로 대체하거나, 단일 목재보다 다루기 쉬운 합성 목재를 선호하는 등 부단한 '개선'을 추구한다. 그에게 미학은 '작가적' 표현이 아니라 '엔지니어링'과 '공동체성'의 미학이다.

 

2.2 '작품'의 실험, '참여'의 적용

 

전형적인 건축가들이 사회적 참여 프로젝트를 자신의 작가성을 홍보할 기회로 삼는 것과 정반대로, 시게루 반은 자신의 '작품 활동'을 '사회적 참여'를 위한 실험장으로 활용한다. 그는 넉넉한 예산과 자유도가 보장된 상업 및 문화 프로젝트를 통해 평소 고민하던 재료, 구법, 형식을 실험한다. 예를 들어, 캐나다에서의 프로젝트를 통해 컨테이너 건축을 실험한 후, 그 노하우를 동일본 대지진 피해 지역인 미야기현의 임시 공동주택에 즉시 적용하는 식이다. '작가성'을 보고 의뢰한 클라이언트의 프로젝트를 인도주의적 실천을 위한 기술 개발의 장으로 삼는 이러한 태도는 그의 확고한 윤리적 에토스를 보여준다.

 

2.3 임시성과 영원성: "사랑받는 건축"

 

반의 건축은 '임시 건축'으로 분류되곤 한다. 그러나 그는 건축의 영원성이 재료가 아닌 '사랑'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사람들이 그 구조물을 사랑하는지 여부가 그것이 영구적이 될지를 결정한다"고 말하며, "사람들이 사랑한다면, 종이라도 영구적이 될 수 있다"고 단언한다.

이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는 1995년 고베 대지진 이후 지어진 '종이 교회(Paper Church)'이다. 160명의 자원봉사자가 5주 만에 완성한 이 지관 구조의 임시 교회는, 10년 후 그 역할을 다하고 대만의 지진 피해 지역인 타오미 마을로 '이주'하여 영구적인 건축물로 기능하고 있다. 반대로 아무리 견고한 콘크리트로 지은 건물이라도, 공동체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상업적 논리에 의해 쉽게 파괴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임시적'인 건축이다.

 

제3장 반(反)건축과 비평의 종말

 

시게루 반의 이러한 태도는 그를 전통적인 건축 비평의 장에서 벗어나게 한다. 알랭 바디우(Alain Badiou)가 '사건에 대한 충실성(fidelity)'을 통해 사건의 의미가 사후적으로 구성된다고 말했듯, 반의 건축물은 그 자체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3.1 형식 비평의 무력화

 

반의 건축은 그 건축물에 부여된 '맥락적 가치', 즉 에토스와 내러티브가 평가의 대상이 될 뿐, 형식적으로는 분석을 거절한다. 리미널 스페이스나 키오스크에 대한 형식적 분석이 얄팍해지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고베의 '종이 교회'를 순수한 조형물로 분석하는 것은 그 건물의 본질을 완전히 놓치는 행위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게루 반의 건축은 진정으로 '파괴적'이다. 그는 건축의 약한 부분이 아니라 가장 강한 부분, 즉 '형식 비평'이라는 건축의 핵심 작동 기제를 파괴한다. 그는 건축을 짓거나 부수는 대신 '전개하거나 거두어들이고', 한 국가의 재난 대응 법규를 바꾸는(그의 종이 칸막이 시스템은 이후 일본 정부의 표준 재난 구호 물품이 되었다) 등, 건축의 정의 자체를 확장한다.

 

3.2 작가적 순진함: 비평의 잔여물

 

물론 시게루 반을 신화화할 수는 없다. 그의 '작가적' 작업 중 일부는 비평의 여지를 남긴다. 히로시마의 시모세 미술관(SIMOSE Art Museum) 프로젝트에서 나타나는 순진한 은유들—예를 들어 히로시마가 선박 제조 기술로 유명해서 배 모양을 고안했다거나, 특정 국가의 상징이 다섯 장의 꽃잎이어서 오각형 매스를 사용했다는 식의 접근—은 되새겨볼 가치가 없는 얄팍한 형식주의에 머무른다. 이는 그의 '사회적 참여' 작업이 보여주는 치열한 합리성과는 대조적이다.

 

결론: '옳은' 코스모폴리탄

 

이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시게루 반은 오늘날 우리가 기꺼이 준거로 삼아야 할 건축가의 모델을 제시한다. 그는 '코스모폴리탄'이라는 가치의 옳은 버전을 보여준다. 그의 건축은 세계시민을 위한 것이면서도 교훈적이거나 오만하지 않고, 인류애적이지만 공을 가로채려 하지 않는다. 그의 작업은 로컬하지만 오리엔탈리즘에 빠지지 않으며, 값싸고 임시적이지만 견고하고 깨끗하다.

그의 건축이 비평하기 어렵다면, 그것은 그의 작업이 미학적 판단의 영역을 넘어 보편적 가치와 공동선이라는 도덕적 당위의 영역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게루 반의 건축은 모더니스트의 의식과 엔지니어의 형식을 함께 갖춘 진정한 합리주의자의 초상이며, 어떤 건축은 '비평'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파괴'되어야 할 낡은 관습에 맞서기 위해 존재함을 증명한다.



 

1. 철학적 토대: 미스적 위계의 정의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의 건축을 관통하는 질서는 단순한 미학적 선호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기능적, 사회적 위계를 넘어선 존재론적(ontological) 위계에 대한 깊은 탐구의 산물이다. 그의 건축에서 나타나는 위계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건물의 '이데아(idea)'와 우연적이고 경험적인 건물의 '현상(phenomenon)' 사이의 신플라톤주의적 구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이데아는 구조체, 즉 '뼈(bones)'로 표상되며, 현상은 공간을 구획하는 외피, 즉 '살(skin)'로 나타난다. 이 위계질서는 그의 전 생애에 걸친 건축 작업을 해독하는 개념적 열쇠이다.

 

1.1 바우쿤스트(Baukunst)의 추구: 시대정신의 의지로서의 건축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야망은 단순히 기능적인 건물을 설계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바우쿤스트(Baukunst)', 즉 '건축예술'을 추구했다. 이는 당대의 시대정신(Zeitgeist)의 영적인 본질에 형태를 부여하는 행위였다. 그의 저명한 선언, "건축은 시대의 의지를 공간으로 전환시킨 것이다(Architecture is the will of an epoch translated into space)"는 건물이 그 시대의 가장 심오한 진실—미스의 관점에서는 기술, 합리주의, 그리고 새로운 비인격적 질서의 진실—을 구현해야 한다는 신념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바우쿤스트'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위계적이다. 그것은 건축에 영적이고 역사적인 사명을 부여함으로써 단순한 '건설(building)' 행위 위에 군림하는 '건축(architecture)'을 상정한다. 이 거대한 야망은 필연적으로 건물 자체 내에서도 위계를 창조하도록 이끌었다. 건물의 모든 요소가 이 시대를 초월하는 '의지'를 동등하게 표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배관 설비는 주 구조 프레임보다 시대정신을 덜 순수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미스는 암묵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건축 요소들이 지닌 영적이고 철학적인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등급을 매겼다. 이것이 바로 그의 위계 개념의 기원이다. 건축의 어떤 요소는 시대의 영원한 진리를, 다른 요소는 일시적인 필요를 담아내도록 구별된 것이다.

 

1.2 "거의 아무것도 아닌(Beinahe Nichts)": 물질적 절제를 통한 영적 열망

 

미스의 유명한 경구 "적을수록 많다(Less is more)"는 미학적 간결함을 넘어선 영적인 수련의 과정이었다.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beinahe nichts)"으로의 환원은 본질적인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비본질적인 것을 제거하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환원주의는 신플라톤주의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 연결되며, 정화를 통해 신 또는 진리를 찾는 과정으로 해석될 수 있다. 미스에게 있어 건축적 형태의 극단적인 단순화는 물질 세계의 혼란을 제거하고 순수한 존재의 영역, 즉 영적인 영역에 도달하려는 시도였다.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의 추구는 근본적인 역설을 낳는다. 건물에서 가장 실재적이고 물리적인 부분인 구조체를 초월적이고 영적인 것으로 느끼게 만들기 위해, 미스는 그 주변의 모든 것을 비물질화해야만 했다. 여기서 위계는 단순히 요소를 분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위' 요소들(살, 레이어)을 '주요' 요소(뼈, 그리드)를 영적인 영역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배경으로 사용하는 전략이 된다. 즉, '살'의 물질성이 희생되거나 비물질화됨으로써 '뼈'의 영적인 영광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건물의 가장 본질적인 물질 요소는 구조체, 즉 '뼈대'이다. 산업 제조의 산물인 강철 I-빔을 어떻게 영적으로 만들 수 있는가? 기술의 '사실'로서 주어진 빔 자체의 형태를 바꿀 수는 없다. 따라서 그 주변의 맥락을 바꿔야만 한다. 주변의 외피를 투명하고, 반사적이며, 비구조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구조 프레임은 고립되고 순수한 추상적 오브제로 제시된다. 이는 기능적, 미학적, 철학적 위계가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이다.

 

1.3 요소의 존재론: 구조(뼈)와 외피(살)의 구분

 

이 개념은 미스 위계의 양극단을 정의하는 핵심이다. 구조는 객관적 사실, 기술, 그리고 영원한 진리의 영역으로 제시된다. 반면, 외피는 주관적 경험, 예술적 구성, 그리고 공간적 자유의 영역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분리는 그의 핵심 원리였으며,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Karl Friedrich Schinkel)과 헨드릭 페트뤼스 베를라허(Hendrik Petrus Berlage)와 같은 선구자들로부터 이어진 구조적 정직성(tectonic honesty)의 역사적 선례를 따른다. 미스에게 있어 프레임은 '실재하는' 건축 그 자체였고, 벽은 단지 공간을 나누는 스크린에 불과했다.

이러한 구조와 외피의 분리는 칸트(Kant) 철학의 물자체(noumenon)와 현상(phenomenon) 같은 철학적 이원론을 건축에 직접적으로 투영한 것이다. 구조 프레임은 '물자체', 즉 객관적 실재이며, 그것을 둘러싼 레이어들은 '현상', 즉 그 실재가 주체에 의해 인식되는 방식이다. 합리적이고 불변하는 그리드는 객관적이고 예지적인(noumenal) 영역을 대표한다. 반면, 반사, 투명성, 그리고 변화하는 인식을 만들어내는 레이어들은 주관적이고 현상적인(phenomenal) 영역을 대표한다. 따라서 미스의 건축은 거주자가 객관적 진리와 주관적 인식 사이의 긴장을 경험하는 철학적 드라마의 무대가 된다. 그는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거주자가 객관적 진리와 주관적 인식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체험하게 하는 철학적 모델을 창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섹션 2: 합리적 질서의 현현으로서의 그리드

 

그리드는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세계관을 구현하는 주요 도구이다. 그것은 이성, 보편성, 그리고 산업 시대의 비인격적 질서를 물리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구조의 '진실'이 투영되는 시스템이 바로 그리드이다. 그리드는 미스의 건축에서 단순한 구성 도구를 넘어, 그의 철학적 신념 체계 그 자체를 대변한다.

 

2.1 실용적 도구에서 형이상학적 틀로: 미스적 그리드의 진화

 

미스의 그리드는 미국 철골 구조 건설의 실용적인 기원에서 출발하여,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질서 원리로서 격상되었다. 그것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인 동시에 신념 체계의 선언이었다. 그리드는 전체 디자인을 규율하는 "비인격적이고 객관적인" 시스템으로 작용했으며, 산업적 합리화와 표준화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미스는 이를 통해 "새로운 구조적 원리"를 창조하고자 했다.

미스에게 그리드는 보편적인 자연법칙의 건축적 등가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디자인을 그리드의 공정한 논리에 종속시킴으로써, 자신의 주관적인 변덕을 제거하고 더 높은 객관적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고 믿었다. 미스는 건축이 개인의 의지가 아닌 "시대의 의지"를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산업, 기술, 합리주의로 정의되었다. 이러한 시대정신을 가장 순수하게 건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무한히 확장 가능하고, 비위계적이며, 합리적인 시스템, 즉 그리드였다. 그리드를 절대적인 원칙으로 채택함으로써 그는 자기부정의 행위를 수행했다. 디자인 결정은 '그의 것'이 아니라 시스템의 논리에 의해 좌우되었다. 따라서 그리드는 단지 패턴이 아니라, 주관성보다 객관성을 우선시하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리드는 미스가 한 걸음 물러서서 시대정신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장치였던 것이다.

 

2.2 그리드와 보편적 공간: 균질하고 무한한 장의 창조

 

그리드는 '보편 공간(Universalraum)', 즉 어떤 기능이든 수용할 수 있는 유연하고 미분화된 공간을 달성하는 핵심 열쇠이다. 그리드는 방향성 없는 균질한 점들의 장(field)을 만들어내며, 이 장은 어떤 한 점도 다른 점보다 중요하지 않은 '보편 공간'의 창조를 가능하게 한다. 이 개념의 궁극적인 사례는 일리노이 공과대학(IIT)의 크라운 홀(S.R. Crown Hall)에서 찾아볼 수 있다. 크라운 홀은 내부 지지 기둥이 전혀 없는 "보편적 공간"으로, 그리드는 거대한 지붕 구조와 창 멀리언(mullion)으로 표현된다.

'보편 공간'이라는 개념은 정치적, 사회적 함의를 지닌다. 비위계적인 공간을 창조함으로써 그리드는 민주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사회의 이상화된 비전을 투영한다. 그것은 고정된 위계가 없는 사회, 유연하고 현대적인 사회 질서를 제안한다. 그러나 이 '자유'는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드의 절대적이고 전체주의적인 통제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사용자는 미스가 정한 시스템 내에서라면 무엇이든 할 '자유'가 있다. 이는 모더니즘의 핵심적인 긴장을 드러낸다. 진정한 자유는 무정부 상태가 아니라, 완벽하게 합리적이고, 따라서 완벽하게 통제되는 시스템을 통해 달성된다는 사상이다. 모든 기둥과 멀리언의 배치는 미리 결정되어 있으며, 이 경험은 그리드의 논리에 대한 복종을 전제로 한다.

 

2.3 상징으로서의 I-빔: 그리드의 절점이 미적 오브제가 될 때

 

분석의 초점은 이제 그리드의 구조적 표현으로 이동한다. 특히 시그램 빌딩(Seagram Building)의 외부 멀리언으로 사용된 I-빔은 미스 철학의 궁극적인 상징으로 분석될 수 있다. 그것은 그리드의 일부를 가시화한 것이며, 구조적 사실을 숭고한 오브제로 변환시킨 것이다. 그의 신조 "신은 디테일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s)"는 바로 여기서 완벽하게 예시된다. I-빔의 디테일은 장식이 아니라, 건물의 내적 진실을 드러내는 계시이다.

시그램 빌딩의 비구조적 I-빔은 미스의 작업에서 가장 명시적인 '투영' 행위이다. 그는 말 그대로 구조 그리드의 '이데아'를 건물의 외피에 투영하고 있다. 미스의 위계는 구조 프레임의 표현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그러나 당시 건축 법규는 시그램 빌딩의 실제 강철 프레임을 내화 성능을 위해 콘크리트로 감싸도록 요구했다. 이로 인해 구조의 '진실'이 보이지 않게 되는 딜레마가 발생했다. 미스의 해결책은 청동 I-빔을 외부에 추가하는 것이었다. 이 빔들은 구조적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급진적인 행위이다. 그는 구조의 상징, 즉 재현물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행위는 그의 주된 목표가 편협한 의미의 '재료에 대한 정직성'이 아니라 '철학적 정직성'이었음을 증명한다. 그는 보이지 않는 질서를 보이게 만들어 그리드의 '개념'을 파사드에 투영함으로써, 실제 구조가 숨겨져 있을 때조차도 외피에 대한 구조의 우위라는 자신의 위계를 고수했다.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진실은 문자 그대로의 물질적 진실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철학적 진실이었다.

 

섹션 3: 지각적 경험의 장치로서의 레이어

 

그리드가 객관적 질서의 시스템이라면, 레이어는 주관적 경험의 시스템이다. 이 섹션에서는 미스가 유리, 석재, 물의 평면을 사용하여 유동적이고 모호하며 현상학적으로 풍부한 공간 경험을 어떻게 창조했는지 탐구한다. 이 경험은 그리드의 경직성과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레이어는 그리드가 설정한 엄격한 규칙에 대한 시적이고 감각적인 응답이다.

 

3.1 투명성의 시학: '비-벽(Non-Wall)'으로서의 유리벽

 

유리 커튼월은 단순한 창이 아니라 철학적 선언이다. 그것은 공간을 동시에 정의하고 해체하는 레이어로서, 내부와 외부 사이에 복잡한 관계를 만들어낸다. 판스워스 주택(Farnsworth House)에서 유리는 최소한의 장벽으로 작용하여, 자연 그 자체가 집의 진정한 '벽'이 되게 한다. 이러한 접근은 완전한 투명성이라는 이상과 그것의 실제 사용 사이의 긴장을 드러낸다. 유리는 "살과 뼈(skin and bones)" 건축을 달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유리 레이어는 건물 외피를 비물질화하는 주된 동인이다. 그 목적은 '살'을 사라지게 만들어 다른 두 가지 요소, 즉 거주자와 외부 세계 사이의 직접적인 시각적 연결, 그리고 '뼈'(구조 프레임)의 가시성을 최우선으로 만드는 것이다. 미스의 위계는 구조를 1차적으로, 외피를 2차적으로 규정한다. 외피를 가능한 한 '부차적인' 것으로 만드는 방법은 그것을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유리벽은 역설적인 오브제다. 날씨를 막는 물리적 장벽으로 존재하지만, 시각적으로는 거의 부재한다. 그것은 '비-벽'이다. 유리를 사용함으로써 미스는 '살'의 존재감을 최소화하고, 이는 결과적으로 구조 프레임과 주변 환경의 인지된 중요성을 극대화한다. 즉, 유리 레이어는 위계 내 다른 요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양보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3.2 독립된 평면: 재료와 색으로 공간을 레이어링하다

 

이 분석은 바르셀로나 파빌리온(Barcelona Pavilion)과 투겐타트 주택(Tugendhat House)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독립 평면(free-standing plane)에 초점을 맞춘다. 대리석, 오닉스, 트래버틴과 같은 재료로 만들어진 이 레이어들은 공간을 완전히 둘러싸지 않으면서 공간을 정의하여, 유명한 '흐르는 공간(flowing space)'을 창조한다.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의 독립벽들은 구조적 하중을 지지하지 않으면서 동선을 유도한다. 이러한 효과는 경계가 명시되기보다는 암시되는 "흐르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신중하게 선택된 재료들은 그 자체로 미적 사건이 된다.

이 독립 평면들은 미스 시스템의 '예술적' 또는 '우연적' 요소들이다. 그리드가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산문'을 제공한다면, 이 레이어들은 구체적이고 시적인 '운문'을 제공한다. 그들의 배치는 자유로워 보이지만, 항상 보이지 않는 그리드에 의해 규율되어 인지된 자유와 실제 질서 사이에 긴장을 조성한다.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은 규칙적인 십자형 기둥 그리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객관적 질서이다. 동시에 대리석과 오닉스 평면들은 독립적이고 예술적으로 배치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레이어이다. 그러나 그 배치는 무작위적이지 않다. 그것들은 그리드의 보이지 않는 선들과 정렬되고 상호작용한다. 이는 변증법을 창조한다. 그리드는 기저의 규칙, 즉 문법을 제공한다. 평면들은 단어와 문장처럼 시적으로 배열될 수 있지만, 여전히 그 문법을 따라야 한다. 이는 위계를 반영한다. '뼈'(그리드)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법칙을 설정하고, '살'(레이어)은 그 법칙 안에서 통제된 예술적 자유를 허용받는다. 즉, 예술(레이어)은 자유롭지만, 오직 진리(그리드)의 절대적인 틀 안에서만 자유롭다.

 

3.3 반사와 모호성: 공간의 증식과 경계의 흐림

 

이 부분에서는 광택 있는 석재, 크롬 도금 기둥, 그리고 수면에서의 반사를 사용하여 공간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레이어링하는 기법을 탐구한다. 반사는 증식자(multiplier)로 작용하여, 거주자의 고체와 공허, 실재와 허상에 대한 인식을 시험하는 가상의 레이어들을 만들어낸다.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의 재료들(크롬, 유리, 물)에서 반사의 사용은 "비물질화되고" 무한한 공간을 창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레이어가 어떻게 지각적 모호성을 생성하는지에 대한 분석을 직접적으로 뒷받침한다.

반사의 사용은 '살'의 부차적이고 현상적인 본질을 주장하는 궁극적인 도구이다. 반사면은 그 자체의 이미지를 가지지 않으며, 오직 주변의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것은 순전히 다른 오브제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레이어이다. 이는 존재론적 위계를 강화한다. 구조 프레임(그리드)은 고정된 객관적 정체성을 가지는 반면, 둘러싸는 평면(레이어)은 빛, 날씨, 그리고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동적이고 우연적인 정체성을 가진다. 반사로 가득 찬 건물을 만듦으로써, 미스는 단단한 매스의 건축이 아닌 지각의 건축을 창조한다. 이는 '살'을 비물질화하고 덧없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경험으로 만든다. 반면, 구조 기둥들은 종종 무광이거나 명확하고 견고한 형태를 유지하며, 변화하는 반사 속에서 불변의 존재로 남는다. 이는 철학적 위계를 다시 한번 강화한다. 그리드/구조는 불변하는 객관적 '실재'이며, 레이어화되고 반사적인 살은 덧없는 주관적 '현상'이다. 미스의 건축은 관찰자에게 이 구분을 직접 경험하도록 강요한다.

 

섹션 4: 실천적 종합: 투영의 사례 연구

 

이 섹션에서는 이론적 틀을 미스의 주요 프로젝트에 적용하여, 그리드와 레이어의 변증법이 그의 위계를 투영하기 위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구체적인 증거를 통해 보여준다. 분석에 앞서 명확하고 구조화된 개요를 제공하기 위해 비교 분석표를 제시한다.

 

표 4.1: 미스 반 데어 로에 주요 작품의 그리드-레이어 적용 비교 분석

 

프로젝트 그리드 적용 (질서의 투영) 레이어링 기법 (경험의 투영) 표현된 위계 (종합)
바르셀로나 파빌리온 (1929) 8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구조 그리드를 통한 암시적 공간 질서. 그리드는 압도적인 시각 요소라기보다 미묘한 조직 원리. 화려한 대리석과 오닉스로 된 독립 평면; 투명, 회색, 녹색 유리의 평면; 넓은 반사 연못. 레이어는 공간을 둘러싸지 않으면서 정의. 지붕과 외피의 분리: 지붕 평면은 독립벽 위로 독립적으로 떠 있어, 구조(지붕/기둥)가 외피(벽)와 존재론적으로 분리되어 있음을 보여줌.
판스워스 주택 (1951) 명시적인 구조 프레임. 8개의 I-빔은 지면에서 들어올려진 지배적인 미학적, 형태적 요소. 그리드가 곧 건물임. 투명한 외피를 형성하는 단일하고 연속적인 전면 유리 레이어. 내부는 중앙 서비스 코어로 레이어화됨. 프레임의 절대적 우위: 집은 구조 프레임에 의해 공간에 떠 있는 두 개의 수평면(바닥과 지붕)으로 구상됨. 유리 '살'은 프레임의 절대적 우위를 위해 존재하는 거의 부재에 가까운 2차적 레이어.
S.R. 크라운 홀 (1956) 기념비적인 외부 프레임. 지붕의 4개 거대한 강판 거더가 기둥 없는 "보편 공간"을 창조. 그리드는 지붕과 파사드 멀리언으로 표현됨. 강철 멀리언으로 분할된 단일하고 균일한 유리 레이어. '레이어'는 그리드의 표현과 완전히 통합되고 규율됨. 구조와 공간의 통합: 위계는 구조(지붕 거더)가 공간의 유일한 창조자가 됨으로써 표현됨. 공간이 곧 구조임. 유리 외피는 이 사실을 찬미하는 팽팽하고 최소한의 막.
시그램 빌딩 (1958) 내화 피복 뒤에 숨겨진 합리적 구조 그리드. 그러나 비구조적인 청동 I-빔 멀리언을 통해 파사드에 투영됨. 그리드는 상징적이고 리듬감 있는 장치가 됨. 청동과 착색 유리의 외피. 타워는 화강암 광장과 함께 거리에서 뒤로 물러나 있어, 공공에서 사적으로 이어지는 시퀀스를 레이어링함. 질서의 상징적 표현: 위계는 상징적으로 주장됨. 비구조적 멀리언은 구조 그리드의 이데아에 대한 증거이며, 개념적 질서가 문자 그대로의 구조적 표현보다 더 중요했음을 보여줌.

 

4.1 바르셀로나 파빌리온 (1929): 비물질화된 이상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은 미스의 위계 개념이 가장 시적으로 구현된 사례 중 하나이다. 여기서 그리드는 미묘한 십자형 기둥들을 통해 암시적으로만 존재하며, 자유롭게 배치된 것처럼 보이는 대리석과 유리 평면들을 위한 보이지 않는 질서 체계를 제공한다. 구조는 8개의 가느다란 크롬 도금 기둥과 평평한 지붕 슬래브로 환원된다. 이 구조는 공간을 정의하는 화려한 벽체들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 특히 지붕 평면이 벽체와 어떤 접촉도 없이 그 위를 떠다니는 듯한 모습은 구조(뼈)와 외피(살)의 존재론적 분리를 절대적으로 선언한다.

레이어링 기법은 공간 경험을 극대화한다. 녹색 톤의 유리, 반투명 유리, 그리고 붉은 빛이 감도는 오닉스 벽과 같은 다채로운 평면들은 시각적 깊이와 복잡성을 만들어낸다. 이 벽들은 공간을 완전히 막지 않고 동선을 유도하며 시선을 차단하거나 열어주어, 거주자가 움직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공간감을 느끼게 한다. 여기에 더해, 건물 바닥을 형성하는 거대한 반사 연못은 외부의 레이어로서 기능하며 건물의 기반을 시각적으로 해체하고 하늘과 주변 환경을 건축 내부로 끌어들인다. 반사와 투명성, 그리고 물질의 병치는 파빌리온을 물리적 실체라기보다는 지각적 현상의 집합체로 만든다.

 

4.2 판스워스 주택 (1951): 구조 프레임의 절대적 우위

 

판스워스 주택에서 미스의 위계는 가장 명료하고 교훈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건물은 바닥 평면, 지붕 평면, 그리고 이 둘을 허공에 띄우는 8개의 구조 기둥이라는 절대적인 본질로 환원된다. 여기서 그리드는 더 이상 암시적인 질서가 아니라 건물 그 자체이다. 하얗게 칠해진 강철 프레임은 건축의 유일한 주인공이며, 모든 미학적, 형식적 표현을 독점한다.

유리벽은 이 위계를 강화하기 위한 극단적인 장치이다. 그것은 '제로-디그리(zero-degree)' 외피, 즉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 모든 건축적 중요성을 강철 프레임에 양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레이어이다. 유리는 외부 자연을 내부로 끌어들이는 동시에, 내부의 거주자를 외부의 시선에 완전히 노출시킨다. 이는 투명성이라는 이상이 실제 거주 환경에서 야기하는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미스의 철학적 관점에서 이 유리는 '살'의 역할을 최소화하여 '뼈'의 순수하고 절대적인 존재를 찬미하기 위한 필수적인 희생이었다. 판스워스 주택은 구조가 곧 건축이며, 외피는 단지 그것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투명한 막에 불과하다는 미스의 신념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4.3 크라운 홀 (1956) & 시그램 빌딩 (1958): 그리드의 도시적, 상징적 표현

 

미스의 후기 대규모 작업에서 그리드와 레이어의 관계는 더욱 복잡하고 상징적인 차원으로 발전한다. IIT 캠퍼스의 크라운 홀은 '보편 공간'의 궁극적인 실현이다. 건물 외부에 노출된 4개의 거대한 강판 거더가 지붕 전체를 지탱하여, 내부에는 어떠한 기둥도 없는 70미터 길이의 거대한 단일 공간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위계는 외부의 거대한 구조가 내부 공간 전체를 규정함으로써 표현된다. 공간은 구조의 직접적인 결과물이며, 유리와 강철 멀리언으로 이루어진 외피는 이 거대한 구조적 위업을 감싸는 팽팽하고 정밀한 막의 역할을 한다. 레이어는 그리드의 논리에 완전히 종속되고 통합되어, 구조적 질서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수행한다.

시그램 빌딩은 이 논의의 정점을 이룬다. 이 고층 건물에서 미스는 자신의 위계를 가장 의식적이고 이론적인 방식으로 투영했다. 실제 구조 프레임은 내화 피복 뒤에 숨겨져 있지만, 미스는 비구조적인 청동 I-빔을 외피에 부착하여 내부 그리드의 리듬과 질서를 외부로 '투영'했다. 이 행위는 미스에게 있어 건축의 진실이 단순한 물질적 정직성을 넘어선 개념적, 철학적 질서의 표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청동 멀리언은 구조의 '이데아'를 상징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합리적 질서가 건물의 가장 중요한 본질임을 선언한다. 건물은 화강암 광장 위에 세워져 도시의 그리드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있으며, 이는 공적인 도시 공간에서 사적인 건물 내부로 이어지는 일련의 레이어를 형성한다. 시그램 빌딩은 미스가 자신의 철학적 위계를 도시적 스케일에서 상징적으로 완성한 걸작이다.

 

섹션 5: 결론: 투영된 질서의 영원한 유산

 

결론적으로, 미스 반 데어 로에에게 그리드와 레이어는 단순한 형식적 장치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심오한 철학적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한 도구였다. 그의 건축을 지배하는 위계, 즉 '살'에 대한 '뼈'의 존재론적 우위는 현대 세계 속에서 시대를 초월하는 진리의 건축을 창조하려는 시도였다. 그리드는 '바우쿤스트'의 영원하고 객관적인 질서를 투영했고, 레이어는 공간의 유동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을 투영했다. 이 둘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을 통해 미스는 기술 시대의 합리성과 인간 경험의 시학을 하나의 건축적 총체로 융합하고자 했다.

그리드는 이성의 법칙, 즉 시대정신의 비인격적 의지를 대변했다. 그것은 주관적 변덕을 배제하고 보편적 진리에 도달하려는 미스의 열망을 구현한 형이상학적 틀이었다. 반면, 유리, 석재, 물의 레이어는 빛과 그림자, 반사와 투명성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학적 세계를 창조했다. 이 레이어들은 그리드가 설정한 엄격한 질서 내에서만 허용된 통제된 자유를 누렸으며, 그들의 역할은 궁극적으로 그리드가 표상하는 구조적 진실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접근 방식은 '보편 공간'의 비인간적인 차가움이나 기능적 실패 가능성과 같은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의 건축이 제시하는 절대적인 질서는 때로 인간적인 삶의 복잡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외면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스가 남긴 유산은 지대하다. 그는 건축이 단순히 공간을 만드는 행위를 넘어, 하나의 사상 체계를 구축하는 지적인 행위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미스 반 데어 로에는 강철과 유리뿐만 아니라, 이데아와 개념으로 건물을 지은 건축가로서, 그의 투영된 질서는 오늘날까지도 건축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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